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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부유세대 / 전범선

등록 2019-08-02 17:56수정 2019-08-02 22:40

전범선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한국 사회는 부유해졌지만 청년 세대는 부유하고 있다. 각자 조각배처럼 둥둥 떠서 목적 없이 흐르고 있다. 이천십구년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민주화 이후 태어난 우리는 반도 역사상 최고의 풍요를 누리며 자랐다. 속된 말로 “배가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목이 마르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 정해준 길이 불만족스럽다. 기성세대의 근대적 가치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민족, 국가, 종교, 기업 등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 나름 삶의 뜻을 설정해보지만 정답이 없다. 불안하다. 부유하는 이는 언제 가라앉을지 모른다.

이것은 실존의 문제다. 누군가는 이로 인해 ‘탈조선’ 하고 누군가는 아예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생존’의 문제와 싸워온 윗세대에게 ‘실존’의 문제는 가소롭다. 전쟁과 가난과 독재를 겪은 이들에게 정체성과 다양성과 주체성의 문제는 사치다. 이십세기 한국인의 지상 과제는 부유해지는 것, 즉 근대화의 수면 위로 떠올라 가쁜 숨을 들이쉬는 것이었다. 덕분에 이십일세기 한국인은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다만 왜, 어디로 나아갈지 모를 뿐이다.

반세기 전 미국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이차대전 후 ‘풍요한 사회’에서 자란 청년들은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겪은 부모 세대와 너무 달랐다. 기존 서구문명의 질서와 물질주의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 성적 해방, 약물 복용, 영적 탐험을 통해 자유를 꾀했다. 방랑자적인 비트 세대의 문학이 광란적인 재즈 반주에 맞추어 등장했고, 히피 세대는 로큰롤과 함께 자연으로 회귀했다. 이러한 청년 반문화의 기저에는 불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철학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었다. 잭 케루악은 <달마행자>를 썼고 비틀스는 인도에 갔다. 기독교와 자본주의에서 찾지 못한 답을 동쪽에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를 보아야 하나. 서세동점의 구한말 이래 한국은 쭉 서쪽만 바라보았다. 미국과 유럽 따라잡기에 급급했고, 일본은 그것을 잘한 선례일 뿐이었다. 그렇게 부단히 쫓아간 결과 대한민국은 일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얻었다. 그러나 그곳에도 구원은 없었다. 백년을 달려 도착한 곳에도 결국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을 때. 미국 제국이 쇠퇴하고 서세동점이 끝나가는 이때. 동방의 변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비트족과 히피족처럼 고대 사상에 심취할 것인가. 사이버 우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인가. 아니면 그냥 술이나 먹고 담배나 피울 것인가.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 제각각 발버둥 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발길질이 모든 경계를 깨부수고 있다. 성 정체성, 민족 주체성, 종교 신앙 따위의 관념들이 허물어지고 있다. 별난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이상한 일을 계속 꾸미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이 아주 흥미롭다.

우리는 ‘엔(N)포 세대’가 아니다. 결혼, 집, 출산, 경력 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게 아니다. 나름의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다. 표류와 부유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구조해주는 게 맞지만, 후자는 내버려두는 게 좋다.

부유 세대는 침몰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떠다닌다.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아와 비아의 경계를 넘나든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다. 정처 없는 유랑길에 목적지란 있을 수 없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도 없고 천국이나 극락도 없다. 하루하루 의미를 찾아가는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주의적 존재다. 고양이의 표정에서, 잠깐의 산책에서, 맛있는 커피 한 잔에서 이유를 얻는다. 오늘 당장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대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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