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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인어 공주의 심해수 한 봉지 / 이명석

등록 2019-08-09 17:26수정 2019-08-09 19:13

이명석
문화비평가

여름은 독서의 계절이다. 유례없는 판매부진을 겪고 있는 출판계에선 무슨 소리냐 하겠다. 바꿔 말하자. 폭염은 도서관의 계절이다. 열대야가 지나고 아침이 오면, 도서관엔 푸석푸석한 얼굴들이 모여든다. 티브이와 스마트폰에 매달려 살던 가족들이 책의 숲, 아니 에어컨 바람 속으로 피난을 온다. 왔으니 어쩌겠나, 뭐라도 읽는 척을 해야지. 혹서기는 혹독한 강제 독서의 계절이다.

나는 이 현상이 재미있다. 하지만 피난 인파와 자리를 다투는 일은 버겁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작은 도서관으로 갔다. 거기도 열람용 좌석은 여의치 않았고, 나와 친구는 소모임용의 좌식방에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얼마 뒤, 스무살 정도의 청년이 들어왔다. 그는 우리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여기 못 앉을 것 같아요.” 무슨 뜻이지? 그는 옆 탁자에 앉으며 말했다. “저는 이 책을 읽을 거예요.”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지? “그런데요!” 그는 내게 책을 들고 왔다. “이게 인어 공주인가요?” 외국어 동화책이었고, 인어 그림이 있었다. 그런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돌아가 책을 붙잡고 앉았다. 아마도 경계선 지능의 청년인 듯했다. 그런데 외국어 책을 읽는다니 신기하다 싶었다.

조용해진 건 잠시, 청년은 동화책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나쁘네. 나빠.” 때때로 자신의 감정을 섞기도 했다. 나는 곧 깨달았다. 그는 동화책의 그림을 보면서 제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던 거다. 청년은 가끔 힐끗힐끗 내 쪽을 보기도 했다. 나는 모른 척, 손에 든 책에 빠져 있는 척했다.

두 개의 감정이 쌍둥이 뱀처럼 몸을 꼬며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시끄럽고 귀찮았다. 어렵게 찾은 독서의 공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도대체 저 이야기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지? 인어 공주가 바다를 사이다로 만들어버렸다고? 마실 땐 시원하겠지만, 물 밖으로 나오면 끈적끈적할 건데? 나는 청년의 나이 때 조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척 엉뚱한 이야기를 지어내곤 했다. “삼촌, 감자 새끼 이야기해줘!” 그러면 나는 읽어보지도 않은 감자 새끼의 엉뚱한 모험담을 만들어냈다.

책, 이야기, 도서관이란 원래 그렇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세계다. 더위를 피해보자는 얄팍한 마음으로 도서관을 찾은 사람들이 서가를 어슬렁거린다. 처음에는 외계의 문자 같던 제목들이 서서히 눈에 잡힌다. 셜록 홈스, 바리 공주처럼 티브이에서 보던 이름도 있네. 어라, 토르가 북유럽 신화에서 나온 거야? 그래서 몇 줄이라도 읽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는 경험을 한다. 그런 지적 탈출의 능력은 인간 지능의 가장 고귀한 영역이다. 도서관을 찾은 아이와 어른을 비교하면 아이 쪽이 훨씬 뛰어나다.

우리는 얼마 뒤 짐을 챙겼다. “가시는 거예요?” 청년은 부리나케 자리를 옮겨왔다. 처음부터 우리 자리가 탐났던 거다. 다행이다. 이제 편안히 자기만의 책 세계로 빠져들겠네. 그런데 우리가 도서관을 나서려는 순간, 청년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거 놔두고 가셨어요!” 그가 건넨 건, 빵 봉지를 묶는 작은 끈이었다. 엉겁결에 고맙다며 받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걸 왜?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지.’ 나는 며칠 동안 주머니 속의 빵끈을 조몰락대다 깨달았다. 그래, 이것은 보이지 않는 빵 한 봉지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에어컨 바람 한 봉지, 인어 공주가 담아 준 심해수 한 봉지일 수도 있지. 정말 지옥같이 더운 날에 그 빵끈을 풀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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