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주전장>(감독 미키 데자키)에는 똑같은 컷이 연속해서 두번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일본회의’ 대표위원 가세 히데아키(83)는 말한다. “그건 일본이 전쟁에서 이긴 덕분이죠.” 미키 감독도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었는지, 밑줄을 긋듯 반복해서 편집을 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이긴 덕분이죠.” 가세에게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이 승리한 전쟁이다.
가세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자문위원 등 일본의 여러 극우단체에 적을 둔 유력인사다. 역사 교과서를 자문한다는 이가 ‘정신승리법’으로 역사를 인식하는 게 놀랍지만, 거기에도 나름 연원이 있다.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 일왕의 ‘대동아전쟁 종결조서’다.
‘옥음(玉音)방송’이라고 이름 붙인 라디오 방송에서 일왕은 단 한번도 ‘패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다만 “미·영·중·소의 공동선언을 수락”했으며, 이 또한 “세계의 대세가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앞서 전쟁을 일으킨 것도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란” 것이었음을 애써 강조한다.
가세의 대표적인 활동 공간인 ‘일본회의’는 일본 최대의 극우단체다. 국회의원의 40%, 아베 내각 각료의 80%가 이곳 소속이라는 관측도 있다. 가세가 개중 튈 수는 있어도, 일본 정계 등 주류세력의 정신세계와 동떨어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 내면에는 히로히토 일왕의 ‘옥소리’가 면면히 흐르고 있을 터이다.
광복절이 모레다. 일본에서는 ‘종전 기념일’이다. 정치인들은 이날을 맞아 전범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 물론 전쟁에서 항복한 날을 스스로 ‘패전 기념일’로 비칭하는 나라는 없다. 독일 정부도 1945년 연합국에 항복한 5월8일을 종전 기념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실상은 일본과 전혀 딴판이다.
옛 동독은 그날을 ‘해방일’이라 불렀다. 서독도 1985년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독일 민족이 히틀러 정권에서 해방된 날”로 규정한 이후 주 정부들 차원에서 ‘해방일’로 기려왔다. 일본 극우가 메이지 시대로의 퇴행행동을 보이는 것은 일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자아 발달 단계를 거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안영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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