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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 그래도 진보정치] ‘노 아베’와 촛불 개혁

등록 2019-08-15 17:32수정 2019-08-16 13:08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올여름은 날씨보다도 일본 정부 때문에 더 무덥고 답답하다. 아베 신조 정부는 과거사 문제를 빌미 삼아 경제 보복에 나섰고, 한국 시민들은 이에 맞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펼치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된 불매운동은 잇단 논란 끝에 방향을 “노 재팬”이 아닌 “노 아베”에 맞추며 계속되는 중이다.

그러나 불매운동에 동참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흐름도 있다. 바로 이 국면에서 한국 정부-여당이 내놓는 대책들이다. 일본 정부의 도발이 시작되자 고용노동부는 대뜸 관련 분야 기업의 특별연장근로를 인가하겠다고 밝혔다. 며칠 뒤에는 또 주 52시간 초과근로 금지 제도의 적용을 받지 않는 재량근로시간제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현 정부의 몇 안 되는 개혁 조치 중 하나인 노동시간 단축이 졸지에 백지화되는 꼴이다. 게다가 재벌을 “애국자”라 부르며 대기업에 지금보다 더 많은 특혜를 몰아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런 행태는 대외 갈등을 국내 개혁 요구를 가로막는 핑계로 삼았던 지난 세기의 여러 사례들과 무척 닮았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이 그랬다. 전쟁이 발발할 무렵 영국,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는 개혁을 바라는 노동계급과 여성의 운동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때 마침 전쟁이 일어났고, 참전국 정부들은 자국민에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혁 요구는 접은 채 무조건 전쟁 수행에 협력하라 강요했다. 일부 역사학자는 국내 개혁을 회피하려고 각국 정부가 전쟁을 선택했다는 해석까지 내놓는다. 혹여 정부·여당은 그때 유럽 지배자들과 비슷한 셈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대외 갈등과 국내 개혁의 관계가 이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된 경우도 있었다. 가령 같은 세계 전쟁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전쟁의 성격 자체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시스트 정권의 침략 전쟁에 맞서 민주 국가 인민들이 궐기했다. 그래서 독일, 일본과 싸우면서도 이들 나라 국민이 아닌 독재 정권을 적으로 돌렸다. 전쟁을 파시스트 집권자들에 맞서는 국제 연대 투쟁의 연장으로 이해했다.

그랬기에 전시임에도 국내 개혁을 바라보는 시각이 과거와 크게 달랐다. 가령 영국을 보자. 전쟁이 끝나자마자 영국 사회는 노동당 정부 아래서 복지국가의 기틀을 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개혁 조치의 상당 부분은 이미 전쟁 중에 준비된 것이었다. 전시 거국내각은 노동조합 운동의 요구를 받아들여 1942년에 복지 정책의 골격을 제시한 베버리지 보고서를 완성했다. 노동당뿐만 아니라 보수당, 자유당까지도 나라 밖 반민주 세력에 맞서 승리하려면 나라 안에서 민주적 개혁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결과였다.

이런 선례들 가운데 지금 한국 사회가 좇아야 할 방향은 어느 쪽인가? ‘노 아베’라는 외침의 대상인 아베 신조 총리의 극우 정권은 유사 파시스트 성향을 띤다.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으므로 아직 파시스트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메이지 시대 천황제 국가로 돌아가길 열망하기에 유사 파시스트라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정권에 맞선 싸움은 국가 간 대립이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민주 시민들의 국제 연대 투쟁이어야 한다.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지난 세기의 반파시즘 전쟁 쪽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와야 할 대책은 노동시간 연장이나 재벌 대기업 특혜 확대가 아니다. 오히려 촛불 항쟁 이후 지지부진하거나 뒤집히기 일쑤였던 사회 개혁을 재개하고 가속화하며 확대해야 한다. 노동권을 강화하고 복지를 늘리며 경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아베 정부 같은 세력들이 동아시아에서 가로막고 있는 역사 전개 방향을 한국 사회가 가장 과감하게 열어나가야 한다. ‘노 아베’가 승리하는 길, 그것은 대한민국이 아베 세력이 꿈꾸는 세상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유, 평등, 연대의 공화국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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