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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순억의 학교 이데아] 학교에 살아있는 일제의 기억

등록 2019-08-18 17:45수정 2019-08-18 19:28

안순억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발원지인 광주제일고등학교가 오는 11월3일 학생의 날에 새로운 교가를 채택할 예정이라고 한다. 일제 저항의 상징성을 지닌 학교의 교가가 친일 작곡가인 이흥렬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놀랍지만, 일제 때도 아닌 1958년에 이미 쓰던 교가를 교체한 연유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이흥렬은 ‘음악으로 내선일체를 실현’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인 경성음악협회 등에서 친일 음악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김성태, 김동진, 현제명, 홍난파 등의 친일 행적도 비슷하다.

신채호 선생의 후손이 설립한 광주 광덕중·고 또한 친일 음악가인 김성태가 작곡한 교가를 지난 5월 개교기념일에 맞춰 바꿨다. 지난 7월, 전국 최초로 학생회 차원에서 고등학생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결의한 학교답다.

서울, 광주, 전북, 전남 네 곳을 한정해 살펴보니 무려 165개교가 친일 인사에 의해 작사 작곡된 교가를 쓴다. 이 중 100개가 넘는 곡이 김동진, 김성태, 이흥렬 작곡이다. 전국 학교를 대상으로 엄청난 다작이다. 그것도 일제 때가 아닌 1950년대 이후에 집중된다. 친일 행적이 명백한 인사가, 제국주의 청산을 교육해야 할 학교의 교가를 공장에서 물건 찍듯 생산한 것이다. 일본 군가와 엔카풍 교가도 많다. 노랫말 또한 ‘학도, 건아, 혼백, 용맹, 아시아 동방의, 거룩한’ 등 군국주의와 전체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교육계 권력과 친일 인사들의 불온한 결탁이 의심되는 장면들이다.

교가 교체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교육계의 자정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교가, 교표, 교목, 교과서, 교육용어에는 공동체의 지향과 가치가 상징적으로 담긴다. 친일 인사 개인의 예술적 성취나 작품에 대한 취향과는 다른 문제다. 친일 색채가 뚜렷하지 않은 ‘멀쩡한 노래’까지 바꿔야 하느냐는 반론도 나온다. ‘공적 언어’의 의미를 간과했거나, 아니면 나쁜 저의를 숨긴 프레임이다. 불편한 기억에 대한 피로감을 확산시키는 것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다. 고통의 기억을 희미하게 가리고 좋은 쪽만 보라고 한다. 이를 통해 면죄부와 특권을 유지하고 그 고통을 누군가에게, 또는 미래에 떠넘긴다.

학교 안에 일제 흔적은 곳곳에서 꿋꿋하다. 친일 인사 공적비, 카스가 석등, 군국주의 가치관을 담은 충혼탑 양식의 석물들, 심지어 일왕의 연호인 ‘쇼와’(昭和, 소화)를 쓴 비석 등이 전국 학교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전범기인 욱일기와 일본 경시청 상징을 본뜬 교표를 사용하고, 가이즈카향나무나 히말라야시다가 교목인 학교도 많다. ‘애국조회’를 열고 ‘수학여행’을 가고, 교장은 ‘훈화’와 ‘회고사’를 하고, ‘선도부(주번)’는 일제식 생활규정에 근거하여 두발과 복장을 따진다.

교육 현장 곳곳에 깊숙하게 박힌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친일의 역사를 똑똑히 교육하는 일은 반일감정을 자극하자는 것이 아니다. 철거와 폐지와 교체가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 유·무형의 네거티브 일제 유산 청산 방법에 대해 학교공동체가 머리를 맞대어 방법을 찾으면 된다. 핵심은 유산 속에 기생하는 제국주의적 폭력과 어떻게 결별하느냐의 문제다.

더 중요한 것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훈육 문화 자리에 인권과 민주주의와 평화교육을 앉히는 일이다. 면서기와 순사의 눈에 보이는 친일 너머에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대동아성전’을 앞서 이끌었던, 그래서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전쟁과 죽음으로 내몰았던 지식인과 지도자들의 과오와 책임을 묻는 일이다. 기억을 잃으면 다 잃는다. 치욕과 아픔의 역사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기억상실은 곧 존재상실이다. 정신적 식민주의를 넘기 위한 학교 안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은 진행형 독립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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