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순자는 1979년에 삼척고정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원가족 12명과 함께 잡혀갔다. 남편은 딴살림을 차렸고 열 살, 일곱 살, 네 살 삼남매만 남겨졌다. 외가 쪽 친척은 다 구속됐고 친가에선 외면했다. 엄마의 복역기간 5년간 아이들은 이집 저집 떠돌며 컸다. 학교에선 ‘여간첩의 아이들’로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 큰딸은 학교 갈 차비도 없는데 설상가상 생리를 시작했다. 한번은 하굣길에 생리가 터져서 아무 부잣집에 들어가 청소해드릴 테니 돈 좀 달라고 해 생리대를 샀다고 한다. 3년 전 국가폭력 피해자 인터뷰에서 들은 얘기다. 고문보다 오래가는 상처로 김순자는 큰딸의 생리대 일화를 언급했다. 나 역시 인상깊었다. 큰딸이 나랑 동갑이었다. 간첩사건은 <수사반장> 같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딴 세상 일로 알았는데 내 또래가 이토록 구체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니…. ‘분단국가의 상처’가 일상의 맥락에선 생계부양자의 급작스러운 부재이고 그 자식이 생리대를 구걸하는 상태로의 몰락인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더니 가난도 디테일에 있었다. 그즈음 신발 깔창 생리대 사건이 보도됐다. 사연도 놀라웠지만 40년 시차가 무색하게 빈곤 여성청소년의 처지가 그대로라는 게 나로선 더 충격이었다.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밥 굶고 추위에 떠는 가난은 공론화되는데 생리대 못 사는 사안은 왜 이제껏 잠잠했을까.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에이드리엔 리치)고 했나. 그럴 만도 했다. 생리하는 날은 ‘그날’이고, 생리대는 ‘그거’고, 광고의 생리혈은 파란색이고, 생리대는 까만 비닐봉지에 칭칭 묶어 운반하는 현실. 인구의 절반이 경험하는 월경은 강력한 금기어였고 철저히 비가시화됐으므로 문제점도 은폐된 거다. 그나마 신발 깔창에 덧대어 ‘생리대’란 단어가 공공연히 거론되면서 해결책도 모색하기 시작했다. 빈곤 청소년 생리대 무상지급과 관련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설전이 오갔을 때, 그럼 남자도 수염이 나니까 면도기를 공짜로 달라는 의견이 ‘예상대로’ 나왔다. 누군가 응수했다. 남자도 길 가다가 수염이 갑자기 막 솟아나고 바지를 뚫고 나와 생활에 지장이 생기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렇다. 월경은 제 몸에서 다달이 일어나는 일이지만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기에 고통이다. 생리대가 없으면 앉지도 서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기에 기본권이고 생존권이다. 동료 시민의 처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우린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 전 생리대 무상지원에 관한 국민여론 설문조사가 이뤄졌다. 빈곤 여성청소년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청소년으로 대상을 확장하는 사안이었는데, 예산을 이유로 반대한다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정작 여성청소년은 설문 대상에 없었다. 그건 마치 이성애자끼리 ‘동성애에 찬성합니까?’ 묻는 것처럼 질문 자체가 인권을 거스른다. 사람의 사랑이 그러하듯 사람의 안위도 찬반을 묻는 게 아니라 존중을 구할 사안이다. 세상 쓸데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지만 나는 여성아이돌을 걱정한다. 저 딱 붙는 짧은 옷을 입고 생리 양이 많은 둘째 날엔 어찌 춤을 출까. 얼마 전 여성아이돌의 한 멤버가 공황장애를 이유로 활동을 중단했다. 다른 질병처럼 ‘생리통이 심해서’ 같은 사정도 거리낌 없이 얘기되면 좋겠다. 그럴 때 “1970년대엔 생리대 살 돈이 없어서 남의 집에 가서 일했대” “2010년대엔 신발 깔창을 썼대” 하는 말들이 흑역사로 남고 자판기에서 무상으로 생리대를 뽑아 쓰는 날이 올 거다.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상관없이, 즉 가난을 증명하는 절차 없이 급식도 생리대도 지급되어야 아이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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