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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쓸데와 핀잔으로 키운 나무 / 이명석

등록 2019-09-06 17:53수정 2019-09-06 19:09

이명석
문화비평가

늦은 오후 한가한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여자아이가 발레 스커트를 입고 식탁 사이를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아빠가 아이를 불러 의자에 앉히더니, 스마트폰 게임을 하며 부인에게 말했다. “쟤는 저 치마만 입으면 정신을 못 차리네. 나는 정말이지, 발레는 무슨 쓸데가 있는지 모르겠어.” 그러곤 아이를 곁눈질로 보며 말했다. “차라리 축구나 농구를 하지.”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의자 아래에서 발을 대롱거렸다.

얹힌 듯 소화가 안되어 숟가락을 놓고 나왔다. 돼지국밥의 건더기 대신 물음표 하나가 배 안에 들어왔다. 아빠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발레는 운동도 안 되고 그냥 겉치레라 여긴 걸까? 얼마 전 미국 <에이비시>(ABC) 방송 ‘굿모닝 아메리카’의 진행자가 영국 왕실의 여섯살 조지 왕자가 발레를 배운다는 소식을 전하며 비웃었다. “발레 수업에 행복해한다는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네요.” 나는 발레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성인 발레를 배우는 친구들의 비명 소리는 자주 듣는다. 지금까지 했던 어떤 운동보다 힘들다고.

며칠 뒤 빵을 사들고 스쿠터에 앉았는데 남자아이가 쪼르르 다가왔다. 처음엔 내 가방에 달린 동물 모양 장바구니를 보고 그러는 줄 알았다. “토끼야, 토끼.” 하지만 아이는 쭈그리고 앉아 바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뒤이어 따라온 엄마가 말했다. “얘가 오토바이를 너무 좋아해서요. 왜 그럴까요?” 나는 모른다. 누가 무엇을 왜 좋아하는지. 다만 이건 안다. 누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그 순간만큼 존중받아야 할 시간은 없다는 걸. 나는 <토이 스토리 4>의 듀크 카붐 인형인 척, 아이가 마음껏 관찰하고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며칠이 지나 고등학교의 북토크에 갔다. 발레와 오토바이를 무턱대고 좋아했을 아이들, 그 12년 정도 뒤의 얼굴들이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물었다. “여러분 각자가 정말 좋아하는 걸 말해볼래요?” 학생들은 입을 꼭 닫았다. 나는 안다. 그 나이에는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미취학 아동들은 다투듯 외친다. 공룡이요! 축구요! 꼬랑내 나는 거요! 하지만 학교에 가고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다. 무언가를 무작정 좋아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넌 왜 돈 안 되는 것만 골라서 좋아하니?” “그거 하면 자소서에 한 줄 쓸 수 있어?” 나도 고3 때까지 꾹 참았고, 대학에 합격하자 말했다. 기타를 배우고 싶다고. “쓸데없는 생각 말고 운전이나 배워.”

학생들의 침묵을 깨기 위해, 늘 써먹는 말을 꺼냈다. “이제 ‘쓸데없는 질문’ 세개만 받고 마무리할게요. 정말 쓸데없어야 해요.” 학생들이 낄낄거리며 물었다. “남자인데 머리는 왜 길렀어요?”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 뭐예요?” 나는 쓸데없는 답을 하는 척, 하고 싶은 말을 몰래 전했다. 그들이 늘 보던 삶과 다른 모양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똘똘하게 생긴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래서 1년에 얼마나 버세요?”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래가 불안하다. 그래서 언제나 핀잔이라는 가위를 들고 쓸데없는 관심과 욕망을 잘라버리려 한다. 그러면 아이는 좋아하는 감정을 꺼려하고, 매사에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방문을 쾅 닫고 숨는다. “모두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순 없잖아요.” 맞다. 어른이 되면 그 ‘1년에 얼마’를 벌어야 한다. 그런데 번 다음엔 뭘 하지? 어른이 된다는 건, 남의 간섭 없이 좋아하는 걸 좋아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면? 그런 이는 스스로 핀잔의 가위를 들고 타인의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을 잘라버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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