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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주통신원의 눈] 엄마의 비밀 / 이화리

등록 2019-09-11 17:15수정 2019-09-11 19:34

이화리
경주문인협회 부회장·소설가

“대낮에 돌부리도 없는데 왜 넘어지는데?” 어릴 적부터 걸핏하면 엎어지는 엄마를 보았다. 무릎이 성할 날이 없으니 약간 절름거리는 걸음걸이는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러던 10년 전 어느 날 티브이에서 정신대 문제가 나오자 엄마는 왼쪽 다리가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 짧은 자신의 발을 가지런히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평생 감추었던 비밀을 내게 털어놓았다.

“나도 일본놈들한테 끌래(끌려)갈 뿐했다. 우리 아부지가 이사 헹부(의사 형부) 시키가(지고) 내 발목 심줄(인대)을 끊았뿟다 아이가. 붕대를 칭칭 얼매나 마이 감았등가 내 다리가 짚단(볏단)만했다. 높은 놈들이 자꾸 찾아와가 붕대를 밤낮 감고 있니라꼬 고름이 차고, 고생을 얼매나 했는지. 너거 외할배가 내보고 죽는 날까지 비밀로 하라 캤다. 이거는 니캉 내캉만 알고 아무도 알믄 안 댄다. 죄는 어데 안 간다.” 당시 일제를 속인 것이 죄라고 여긴 무지한 엄마에게 나는 비밀보장을 약속했다.

새 학년이 되면 여느 학부형처럼 엄마는 학교에 왔다. 반 아이들이 수군대어 돌아보면 엄마가 교실 뒤에서 수업참관을 하고 있었다. “와아, 영화배우 겉다.” “맞다, 맞다.” “누구 엄마고?” “야, 진짜, 너무너무 이뿌다.” 이런 말들이 낮은 탄성으로 터졌다. 당시에도 줄임말은 있었다. 불란서망사를 ‘불망’이라 부르는 한복에 화려한 브로치를 꽂고, 검고 윤기 나는 올림머리를 즐기던 엄마는 정말 아름다웠다. 자신의 장애를 감추느라 엄마의 걸음걸이는 아주 빨랐다. 그 장애가 남을 속여 온당치 못했다는 생각을 일생 간직한 엄마는 온화한 얼굴보다 경직된 얼굴을 더 많이 보였다. 늘 긴장하고 히스테리가 제법 심했던 엄마의 내면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식민의 아픈 시간이 있었다.

엄마가 10년 전에 찍은 영정사진은 더 이상 늙지 않지만 아흔을 넘긴 엄마는 지금 요양병원에서 모호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나는 태어나지 않고, 연하디연한 속살이 터지고 또 터지고, 짓무르고 또 짓물렀을 어느 처녀가 될 뻔한 나의 엄마.

1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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