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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서재를 정리하며 / 김찬호

등록 2019-09-20 17:24수정 2019-09-21 16:10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오랜만에 서재를 정리했다. 삼십년 이상 간직해온 책들을 포함해서 수백권을 내다버리는 작업이었다. 10년 이상 읽지 않았고 앞으로 10년 이상 읽을 것 같지 않으면 과감하게 솎아냈다. 한국에서만 매일 200여종의 신간이 나오는데, 금방 포화상태가 되는 서재를 관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퇴직하는 교수들도 연구실의 책을 처리하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예전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기증받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단일 품목으로서 가장 종류가 많은 상품이다. 그만큼 개개인의 관심과 취향이 세밀하게 반영되는 물건이다. 그리고 일반 가재도구들에 비해서 오랫동안 소장된다. 다른 생활물품은 이삼십년 이상 사용되기 어려운 데 비해, 책은 세대를 넘어 보존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서재는 그 가족의 독서 이력을 증언한다. 생애 경로와 사유의 발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는 유서 깊은 공간이다. 알베르토 망겔은 <서재를 떠나보내며>라는 책에서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 자서전은 꾸준하게 쓰이고 첨삭된다. 책을 들이고 내보낼 때마다, 분류 체계와 배열 방식을 바꿀 때마다 업데이트되는 셈이다. 그 과제를 수행할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것은 지식의 유효기간이 점점 짧아진다는 점이다. 과학기술 관련 서적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그렇다.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의 혁신과 거기에 맞물려 벌어지는 상황을 진단하고 해석하는 저술은 금방 옛날이야기가 되기 쉽다. 그리고 요즘처럼 세계의 정치와 경제가 숨가쁘게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시기에는 글로벌 환경을 인식하는 패러다임이 끊임없이 뒤바뀐다. 그래서 불과 3~4년 전에 나온 책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낡은’ 책들만 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쓸모가 있는데도 버려지는 책이 많다. 한때 야심찬 연구 의욕을 가지고 샅샅이 수집했던 몇가지 주제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호기심과 열정이 식었고 앞으로도 되살아날 것 같지 않은 분야의 서적들이다. 설레는 가슴으로 서점을 순례하며 구입하여 오랫동안 애지중지했건만 끝내 한 페이지도 읽지 않은 채 ‘구조 조정’을 해야 할 때 허망함과 아쉬움은 사뭇 크다. 하지만 책의 제목과 목차 그리고 표지나 띠지에 쓰여 있는 글귀들을 훑어본 것만으로도 큰 배움이 되었다고 자위해본다.

그런가 하면 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책꽂이의 한구석을 의연하게 지키는 책들이 있다. 사춘기와 대학생 때 문리(文理)를 트게 해준, 내 나름의 고전들이다. 집 안에 굴러다니던 시집,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된 수필집, 동아리에서 함께 읽은 철학 책 등에 젊은 시절 약동하던 지성과 감성의 흔적이 생생하다. 놀라운 깨우침에 황홀해하면서 밑줄을 긋던 순간들이 역력하다. 학문을 연마하는 엄격함, 내면을 가꾸는 즐거움을 그 나이에 익힐 수 있었음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그런 성장과 도약의 시간이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정보의 범람, 휘발성이 높아지는 지식, 모바일과 유튜브의 일상화, 전자책의 보급 등에 따라 집 안에서 서재는 점점 좁아지는 듯하다. 하지만 그 소박한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일상의 진부함을 넘어서 원대한 세계를 동경할 수 있다. 내가 애용하는 서울의 종로도서관 건물 위에 한때 걸려 있던 표어가 생각난다. “보다 나은 세상으로 열린 문.” 서재는 저마다의 작은 도서관이다. 점점 난해해지는 삶에서 존재의 뿌리를 탐색하는 내비게이션, 마음의 무늬를 그리면서 우주에 접속하는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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