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는 한 손엔 칼, 한 손엔 저울을 들고 있다. 여신이 든 저울은 정의, 곧 법의 집행에서 필수인 균형 감각을 상징한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3800년 전 바빌로니아왕국 함무라비 왕의 법전에까지 이른다. 함무라비법전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동태복수 조항 때문에 무자비한 보복을 정식화한 법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법의 정신은 무자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울의 균형 감각에 있다. 법전이 동태복수를 명문화한 것은 그때까지 권력자들이 함부로 자행하던 사적인 복수, 무제한의 과잉 복수를 제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함부로 벌하지 말라는 것, 잘못한 만큼만 보복하라는 것이다. 이 법의 정신 덕에 함무라비법전은 인류사의 거대한 진보로 기록됐다.
그러나 정의를 갈구하는 인간의 목마름은 자주 적정한 수위를 넘어선다. 집단의 안위가 걸린 문제나 근본적 신념이 걸린 문제에 부닥치면 인간의 정의감은 극한으로 치닫기 일쑤다. 이데올로기적 광기가 낳은 박해와 학살에서 이런 극한의 정의 관념이 날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의는 극단에 이르면 정의의 본질을 잃어버린다. 독일 철학자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정의 관념을 엄격하게 고수할 때 그런 관념은 ‘추상적인 것’이 되어 오히려 극단적인 불의로 판명 날 수 있다”고 말할 때,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가다머는 “극단의 정의는 극단의 불의가 된다”(summum ius summa iniuria)는 라틴어 경구를 인용한다. 정의가 불의로 뒤집히고 마는 것이다.
이런 전도 현상을 우리는 두 달 가까이 나라를 뒤흔든 조국 일가 수사에서 보았다. ‘피의사실’이 언론에 생중계되다시피 할 때 검찰의 수사는 그 자체로 전시재판(show trial), 곧 여론몰이용 공개재판의 성격을 띠게 된다. ‘보여주기식 수사’가 난무한다. 신문의 지면과 방송의 화면을 통해 날마다 매시간 재판이 진행됐다. 작은 의혹이 태산 같은 의혹이 되고, 일말의 위법 가능성이 확정된 범죄행위가 됐다. 망신 주기와 인격 모독이 뒤따랐다. 이것을 정의라고 할 수는 없다. 서초동을 에워싼 100만 촛불의 함성은 정의의 자기 배반을 규탄하고 정의의 본질을 되찾자는 외침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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