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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잃어버린 이웃을 찾아서 / 이명석

등록 2019-10-11 18:12수정 2019-10-12 18:52

이명석
문화비평가

저녁 무렵 집으로 들어가는데, 공용 현관에서 남자가 번호키를 누르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어쩔 건가? 마침 잘되었다며 따라 들어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탈 건가?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우편함을 들여다보는 척, 그가 먼저 올라가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다른 여자가 왔다. 새로 이사를 왔는지 번호 누르는 게 어색했다. 나는 다가가 번호를 눌러줄까 하다가 멈췄다. 저 사람도 낯선 남자와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지는 않을 거다. 머쓱해진 나는 잠시 산책을 하고 돌아오기로 했다.

길가엔 근처에서 열리는 행사 홍보물이 잔뜩 붙어 있었다. 거기엔 마을, 동네, 이웃 같은 단어들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이 뭐가 어려운가?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상황을 피하고 있다.

한때 나는 좋은 동네, 다정한 이웃을 열렬히 갈구했다. 없으면 만들어보려고도 했다. 혜화동, 부암동, 서촌처럼 옛 동네의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가 집을 구했다. 주변의 가게 주인들과 얼굴을 텄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었고, 고양이를 궁금해하는 꼬마들에게 방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조금씩 기대를 접어가야 했다.

나는 제일 먼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포기했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우리는, 서로에게 고통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층간 소음, 택배 분실, 쓰레기 투기, 거기에 정체불명의 누수라도 생기면 불신의 지옥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게 될지니. 나는 도시학자에게 조언을 구해봤다. “서로 공유하는 공간을 공동체의 소통 장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건물의 공유공간이라면 주차장이 있다. 평소 인사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차를 빼달라고 열심히 소통한다.

마을 단위로 영역을 넓히자 그래도 숨이 트였다. 동네에서 열리는 행사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오가며 생각 통하는 사람들을 제법 찾았다. 함께하는 벼룩시장은 실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때마침 지자체에서도 여러 사업을 벌여 ‘사람 냄새 나는 동네’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건물주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애초에 유목민에게 ‘나의 동네’는 판타지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어 여러 지자체에서 ‘마을 공동체’와 관련된 사업들을 벌이고 있다. 거기에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같은 정다운 이웃을 회복하자는 환상이 깔려 있다. 그런데 그런 마을이 실제로 존재했던가? 물론 30년 전에 아이들이 함께 뛰놀던 골목길은 있었다. 하지만 그 골목은 서로의 신발 속까지 훔쳐보며 험악한 뒷말을 하던 세계이기도 했다. 만약 아직 그런 동네가 남아 있다면 30년의 텃세로 딱딱하게 굳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동네는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실체도 불분명한 과거에서 지역 공동체의 이상을 찾고 싶지 않다.

요즘 나는 광화문에서 보드게임 모임을 하고 있다. 강남, 노원, 부천, 심지어 집이 수원인 직장인도 퇴근길에 찾아온다. 얼마 전에는 ‘동네 만들기’ 게임을 했다. 우리는 가상의 마을에 각자 필요하다고 여기는 건물들을 세웠다. 누구는 병원, 누구는 도서관, 누구는 공원을 골랐다. 이어 두 팀으로 나뉘어 마을 만들기 대결을 했고, 밤늦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가까이 살면 좋다. 하지만 가까이 살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터놓아야 한다, 혹은 터놓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여의치 않다면 먼 곳에서 두세 시간 동안의 동네를 경험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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