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개릿 하딘이 말한 ‘공유지의 비극’은 국가 권력의 개입과 사유화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논거로 숱하게 인용돼왔다. 약삭빠른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더 많은 소 방목 경쟁이 비옥한 공유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육이 이 비극을 닮아간다. 명문대 진학과 고소득 전문직을 향한 맹렬한 이전투구는 절대다수에게 좌절과 절망을 안긴다. 나에게만 유독 불리하게 느껴지는 입시 시스템에 대한 불만과 부조리한 특권에 대한 의심으로 언제 터질지 모를 울분을 차곡차곡 쌓는다. 돈 때문만도 아니다. 재산과 정보가 많아질수록 전투력은 더욱 고양된다. 국민의 43.5%가 만성 울분 상태라는 엊그제 <한겨레> 보도도 이 연장선에 있다. 정부가 나서서 바로잡기를 원하지만 계급과 이념에 따라 전혀 다른 열쇠를 내놓는다. 입시제도가 맨 먼저 도마 위에 오르고, 자본과 시장은 투명한 눈금만을 공정의 척도로 삼자 한다. 그러나 대입 제도를 교육개혁의 핵심에 놓고 논란을 거듭하는 것은 하수다. 각자 다른 유불리 셈법을 따지게 하여 서로 대거리를 하게 할 뿐이다. 서열화된 고교와 대학 체제를 바로잡는 일이 먼저다. 학벌과 지역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임금 차별 완화를 바탕으로 깔아야 한다. 외고·자사고 폐지, 공영형 사립대와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구축, 출신학교 차별금지법 제정 등 개혁 입법들을 공론에 올리지 않고 해법은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국가권력의 힘으로 비리를 바로잡고, 사교육 시장과 사학재단에게 교육적 결단을 촉구하는 일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학생, 학부모, 교사, 마을, 시민이 주체로 서지 않는 한 이 사슬을 끊어낼 방도는 없다. 교육은 ‘커먼즈’다. 모두의 공유지이자 공유 자원인 커먼즈여야 한다. 개인은 외롭게 길목마다 선택의 두려움에 시달린다. 시장은 친절하게 불안을 조장하고 탐욕스럽다. 국가는 너무 멀리 있다. 교육이 국가의 것이 되면 부국강병 논리가 드세지고, 자본의 소유가 되면 이윤을 남겨야만 하는 ‘인적 자원’ 양성이 중심이 된다. 권력과 자본에 포획된 질서가 아닌, 체감하는 공동체가 소유하는 교육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공동체와 시민사회를 만드는 일이 근본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만이 아니다. 개인의 소가 아닌 공유된 소였다면, 마을주민 모두가 약속한 규제와 감시 체제가 잘 작동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오스트롬은 국가와 시장의 관리보다 더 높은 효율을 갖는 수많은 공동체 커먼즈의 사례를 찾아내 노벨상을 받았다. 커먼즈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커먼즈 관점이 가장 시급한 곳이 교육이다. 공부의 목적이 입시와 취업으로 한정되면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반짝이는 인문 정신을 키울 수 없다. 실제로 삶의 일차적 동기가 ‘돈, 이미지, 명성’인 학생들과 우울증, 신체적 질병, 약물중독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정적 정서와 이기적 성향이 강하고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보고는 널려 있다. 우리에게도 여러 커먼즈가 있다. 홍성의 홍동마을공동체와 성미산 마을공동체도 생활과 교육 커먼즈 실천들이다. 공동육아와 공동체 기반 대안교육도 사회적 돌봄과 교육을 보여준다. 민간만이 아니다. 교육공동체의 힘으로 ‘모두의 아이’를 키우는 좋은 혁신학교들, 민·관·학 교육 거버넌스의 힘을 보여주는 시흥과 의정부, 노원과 완주 등의 교육혁신지구 활동들도 교육 커먼즈를 만드는 일이다. 성장한 시민과 교육 주체들의 힘으로 교육문제를 스스로 결정해나가는 것이다. 상처 입은 사슴이 가장 높이 뛴다. 불공정과 불평등에 대한 시시비비로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아픈 우리 교육이다. 가장 ‘높이 뛰는’ 철학과 실천과 정책을 찾아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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