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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눈을 감으면 / 김찬호

등록 2019-10-18 17:33수정 2019-10-19 15:31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얼마 전 시각장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의뢰가 들어왔을 때 선뜻 수락했지만,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맹인과 제대로 대화한 기억이 없었다. 한국의 시각장애인이 약 25만명인데,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것은 그만큼 격리되고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서도 그렇다. 외국에는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맹인 가수나 성악가들이 꽤 있지만, 한국에는 1970년에 데뷔한 이용복씨 이후로 주목할 만한 이가 등장하지 않았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가 고민으로 떠올랐다. 앞을 볼 수 없는 분들인 만큼 유념해야 할 점들이 많을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말문을 열면서 ‘오늘 날씨가 참 좋죠?’는 괜찮지만, ‘하늘이 참 파랗고 높더라고요’는 안 되지 않을까. 촛불을 소재로 한 예화를 넣고 싶은데, 자칫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따금 방송에서 시각장애인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전혀 이질감이 안 느껴진다. 헬렌 켈러가 쓴 글을 보아도 ‘석양에 빛나는 노을’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인간의 언어는 시각적인 접점이 없이도 충분히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분들이 ‘빛’의 속뜻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냥 편안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설혹 어떤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낀다 해도, 그것은 이미 익숙한 장애의 일부일 것이다.

강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한가지 특이했던 것은 시선이었다. 보통 대화에서는 눈빛의 교환이 매우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부분이 아예 막혀 있다. 눈길을 맞추지 않으면 소통이 겉돌거나 엇나가기 쉽다. 그러나 이 강의에서는 오히려 몰입이 쉬웠던 것 같다. 온전히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동안 서로의 존재를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영어의 ‘be all ears’(비 올 이어스)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다는 뜻인데, 직역을 하면 ‘(사람이) 온통 귀가 된다’는 정도가 된다. 청각만으로 연결되는 그 강의실에서 우리의 몸은 커다란 귀가 되어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시각정보가 쇄도하는 세상에서 귀는 소외되기 쉽다. 요란한 이미지의 범람은 경청하는 힘을 떨어뜨린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깊이 듣는 촉수가 무디어지는 것이다. 타인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도 귀를 기울이기 어려워진다. 가끔은 시각 회로를 접고 보이지 않는 것을 두드려볼 일이다. ‘빈방에서 홀로 눈을 감으면 우주가 열린다’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말씀처럼, 의외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

그런 시공간에서는 대화의 밀도도 높아질 듯하다. 밤길을 걸으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은은하게 반짝인다.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있으면 긴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진다. 목소리에 고요함이 깃들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다채롭게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시력 장애를 겪는 인구가 늘어나는데, 정보와 소통은 점점 영상 위주로 치우친다. 청각의 세계를 풍요롭게 가꾸는 것은 문화의 긴요한 과제로 보인다.

요즘 나는 어느 야간 대학원 강의에서 매시간 끝날 무렵 불을 끄고 함께 음악을 듣는다. 어둠을 꽉 채우는 선율은 각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밝음 속에서 보이지 않던 삶의 무늬가 비춰지는 듯하다. 그리고 배움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새삼스럽게 의식된다.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열리는 차원이 있다. 당연시되는 일상의 경이로운 이면을 더듬으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각의 씨앗을 돌보게 된다. 더 나아가 미망과 맹목의 굴레를 자각하기도 한다. 이따금 조명을 닫고, 자신의 무명(無明)을 응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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