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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코즈모폴리턴] 산티아고의 ‘시카고 보이스’ / 조계완

등록 2019-10-31 17:52수정 2019-11-02 09:47

조계완

국제뉴스팀 데스크

1956년 9월 세르히오 데 카스트로를 비롯한 칠레 청년 3명이 미국 시카고대에 도착했다. 그 뒤 14년간 칠레 젊은이 100여명이 시카고로 떠나 경제학을 공부했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왔다. ‘시카고 유학’ 대열은 1970년 말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선거 집권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면서 멈췄다. 돌아온 카스트로는 칠레가톨릭대 경제학과 학과장이 돼 있었다. 1973년 9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 17년 철권통치’ 동안 카스트로 등 시카고 출신 경제엘리트들은 경제부처 권력 심장부에 고용돼 새 경제정책을 기획하고 국가·사회 전 부문에 걸쳐 광범하게 실행했다.

시카고에서 배워 온 시장 자유주의 원리를 두뇌와 가슴에 신념이자 소명으로 품고, 이전 아옌데의 보호무역주의·국유화·사회화 정책을 전부 폐기하고 시장을 전면 개방해 칠레를 전세계적 분업의 장에 편입시켰다. 철저한 시장 이데올로기가 독재 권위주의와 공고하게 결합하면서, 개도국 칠레는 이전의 지배적 정책 조류에서 정반대로 돌아서 급진적 시장화 도상에 들어섰다. 시카고에서 양성된, 미국인들보다 더 넓고 깊게 자유시장을 건설해낸 이들 칠레 출신 경제학자들에게는 훗날 ‘시카고 보이스’(The Chicago Boys)라는 이름이 붙었다.

당시 시카고대 교수 아널드 하버거는 시카고대와 칠레가톨릭대 사이에 시장근본주의 정책동맹(이른바 ‘칠레 프로젝트’) 조직망을 구축·가동한 중추적 배후 인물이었다. 1975년 동료인 밀턴 프리드먼 교수와 함께 칠레를 방문해 자유시장 원리를 설파하고 이식한 하버거는 만년에 “내 삶은 남미 출신 제자들을 떼어놓고 생각할수 없다”며 시카고 보이스를 자랑스러워했다.

이 칠레 프로젝트에 포드재단과 록펠러재단이 자금을 지원했고, 양쪽 대학 교수들이 만나는 자리에 칠레 사업가들이 동석하곤 했다. 대학이 돈에 매수됐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칠레는 경제학설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로 선택됐다. 당시는 1948년 산티아고에 들어선 유엔 라틴아메리카 경제위원회(ECLA) 본부에 근무하고 있던 일군의 비판적 경제학자들이 중심-주변부론을 내세우며 ‘남미 저발전’론을 주창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터였다. 시장체제가 태생적으로 다른 모든 대안 모델보다 낫다는 교의로 무장한 시카고학파가 이들 종속이론가 및 케인스주의에 맞서 조직적 싸움에 나선 셈이다. 경제학설의 숱한 수식과 그래프 뒤편에는 평등과 분배를 둘러싼 정치적 전투가 숨어 있다. 1892년에 60만달러를 시카고대에 지원한 ‘석유왕’ 독점자본가 존 록펠러는 생전에 “시카고대학 설립은 내가 한 투자 중에서 최고였다”고 말했다.

역대 노벨경제학상(1969~2019년) 수상자 84명 중에 시카고대에서 교수로 있었거나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 주요 연구업적을 이룬 사람은 대략 29명에 이른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자유시장의 요새’ 시카고 출신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지구촌 곳곳에 현실 정책으로 드리운 시카고 경제철학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시카고 보이스의 선택과 공로를 섣불리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그 후 30여년 칠레는 인상적인 경제 성장을 구가했고, 남미 국가들을 주기적으로 괴롭혀온 경제위기 대열에서 비켜서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시카고 전통의 철옹성 아래 소득 불평등이 누증되고 공공적 삶 같은 ‘사회’는 극심한 결핍을 겪어왔다. 지금, ‘칠레는 깨어났다’는 구호를 앞세운 칠레 시민들의 울분에 찬 저항 시위는 경제학설과 정치를 둘러싼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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