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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자기소개, 참 쉽지 않죠? / 이명석

등록 2019-11-08 18:16수정 2019-11-09 14:00

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첫걸음은 ‘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다. 얼마 전 해방촌에서 색다른 모임이 열린다고 해서 찾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티브이 속 목소리가 갑자기 귀를 당겼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어쩌고 어쩌고 하는 땡땡땡입니다.” 음악 프로그램에 신인 그룹이 나와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이 첫 모임이니 소개하는 시간이 있겠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갑자기 자기소개의 존재론적 고민에 빠졌다.

“너거 아부지 뭐 하시노?” 한때 그런 시대가 있었다. 나의 직업, 없으면 아버지의 직업이 곧 나였다. 그런데 요즘 모임에선 직업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다. “여의도 쪽에서 평범한 일 해요.” “그냥 조그만 장사 해요.” “지방 돌아다니며 입에 풀칠합니다.” 나 역시 그렇다. “지역 주민입니다. 가까워서 와 봤어요.” 이렇게 스무고개 문제처럼 말할 때가 많다.

어떤 직업의 이름이 나오면, 우리는 그것을 습관적으로 서열화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장님과 아르바이트, 꿀 빠는 직장과 돌 캐는 직업은 곧바로 명찰이 된다. 그런 편견이 불편하니 조용히 덮으려는 거다. 물론 눈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알 만한 기업 임원 20년 했고, 사업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 만나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잘 알고 계시네요.

‘참 쉽죠?’로 유명한 그림 선생님, 밥 로스에게 지혜를 빌려보자. “나는 인생의 절반을 군대에서 보냈어요. 집에 올 때마다 작은 군인 모자를 벗고 화가의 모자로 바꿔 썼죠. 거기에서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직업은 그냥 밥벌이, 퇴근 후엔 또 다른 세상에서 산다. 주 52시간 초과근로 금지 제도를 기준으로 약간의 산수를 해보라. 출퇴근과 수면 시간을 빼더라도, 직장 안팎의 시간이 거의 비슷하다. 직장 밖의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프로필을 들여다보면 이런 마음들을 엿볼 수 있다. 거기에 현재는 물론 과거의 직업까지 줄줄이 늘어놓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애정을 퍼붓는 대상, 시간을 투자하는 취미,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적어 놓는 경우가 많다. “대여섯 개의 자잘한 아르바이트. 하지만 진짜 나는 새벽마다 고속터미널 꽃 시장을 헤매는 플로리스트.”

물론 자기소개에는 어느 정도 마진(margin)이 있다. ‘진짜의 나’라기보다는 ‘이렇게 봐 주십쇼 하는 나’라고나 할까? 그 마진이 지나치면 ‘안 사요’, 외면받는다. 하지만 간판이 조금 거창해도 그 모습이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면 응원의 하트를 받게 된다. 반대로 역(逆)마진, 자신의 핸디캡을 통해 공감을 얻어내는 경우도 있다.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트위터의 자기소개에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16살 기후 환경 운동가’라고 적어놓았다.

자신을 떳떳이 소개할 수 없으면, 사람을 만나기가 두렵다. 주변의 숱한 ‘준비생’들이 낯선 모임에 가기를 꺼리는 이유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라는 만화책을 내놓은 김예지도 그랬다고 한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청소 일을 시작했다. 누군가 ‘무슨 일 하세요’ 물으면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삶을 그려보자고 마음먹었고, 아주 멋진 자기소개서를 내놓았다.

자기소개는 ‘내게 이런 이야기로 말을 걸어줘요’라는 제안이 아닐까? 내가 ‘스무살짜리 노묘(老猫) 봉양인’이라고 소개하면, 고양이의 건강법이 궁금한 사람들이 말을 건다. 내가 ‘글 쓰는 일 합니다’ 하면, 요즘엔 말 거는 사람이 별로 없다. 작가가 너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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