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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도서관과 새로운 학연 / 김찬호

등록 2019-12-13 18:08수정 2019-12-14 02:32

김찬호 ㅣ 성공회대 초빙교수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

설경 속에서의 이 외침을 긴 여운으로 남긴 일본 영화 <러브레터>는 주인공 이츠키의 긴 시간 여행을 담아낸다. 그녀는 히로코라는 여성이 자신과 동명이인이었던 중학교 남자 동창에게 잘못 보낸 편지를 받게 되고, 그 편지에 무심코 답장을 한 후에 이어지는 서신 교환을 통해 추억에 잠긴다. 그러다가 이츠키는 그 동명의 남학생이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당시 그 아이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대신 반납해달라고 맡겼던 책의 도서 대출 카드 뒷면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놓은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십수년의 세월을 건너 드러난 본심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전자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에 사용되던 대출 카드는 단순한 사무용품이지만, 이용자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책을 빌려갔던 사람들의 이름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모교의 대학에서 종종 책을 열람하는데, 오래된 책들 가운데 아직도 카드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경우가 있다. 꺼내어 그 이름과 소속 학과 그리고 대출 날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당시 학생들의 지적인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이따금 아는 이름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 친구가 이런 책을 읽었구나 하면서 새삼스러운 감회에 잠긴다.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이어질 수 있음은 고마운 일이다. 도서관이 그런 미디어로 작용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이제는 예전 같은 대출 카드는 없지만, 각 도서관은 모든 소장 도서의 대출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런데 현재 그 정보는 단순한 도서 관리에 쓰일 뿐이다. 데이터가 점점 더 부가가치를 발휘하는 시대에 소중한 자원을 사장시키는 셈이다. 어떤 활용 방안이 있을까.

이미 도서관에서는 독서 토론이 다채롭게 열리고 있다. 그런데 회원으로 구성된 동아리가 일정한 책들을 중심으로 꾸려가는 모임이거나, 도서관에서 화제작을 중심으로 마련하는 저자와의 대화 같은 일회적인 행사가 대부분이다. 그와 별도로 좀 더 세분화된 책모임을 생각해본다. 나는 어떤 책을 감명 깊게 읽을 경우, 그 책이나 저자에 흠뻑 빠져든 다른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그런데 만날 길이 없다. 이런 경우 도서관은 이용자의 신청을 받아 소박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선정된 책의 대출자들을 검색해서 개별적으로 안내하고 참여 희망자들을 모아 시간을 정해 장소를 제공하면 된다.

물론 책에 대한 소통은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생생하다. 지역 도서관은 그런 접속을 무한하게 빚어낼 수 있다.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어떤 책을 빌려 보는지에 대한 정보에 관한 한 절대적이고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대학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점점 개별화되는 상황에서 책을 매개로 지적인 유대를 촉매함으로써 대학문화의 자양분을 일궈낼 수 있다. 그런 네트워크나 소모임들이 활성화되면 도서관은 열람실이나 도서 대여소 이상으로 지성의 요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서들도 문헌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을 넘어, 이용자들을 연결하는 연출가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학연이 매우 중요하다. 모교 동문들끼리의 연줄이 곳곳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새로운 학연이 필요하다. 말 그대로 ‘배움의 인연’이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다양한 관심사에 따라서 인연을 맺고 함께 생각을 키워갈 수 있어야 한다. 도서관이 그러한 시민적 지성을 편집하는 거점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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