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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상봉, 씨알의 철학] 미국을 설득하기 전에 우리 아버지들을

등록 2019-12-24 18:09수정 2019-12-25 10:28

겨울은 추억을 위한 계절이다. 추억은 지금 없는 것과의 만남이다. 이를테면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물려준 외투를 걸치고 외출하기 전 거울 앞에 서면 문득 그 시절 아버지가 마주 서 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다정하게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집단농업 공동체 키부츠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아들에게 열심히 설명하다가, 논문의 각주처럼 덧붙였다. “그게 일종의 사회주의 공동체다.” 아들이 화답했다. “그럼 사회주의가 좋은 거네요.” 그 순간 눈에 번갯불이 번쩍 튀면서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네가 공산당을 뭘 알아?” 그 분노의 이유를 아들은 감히 묻지 못했다. 아버지는 몇년 뒤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뒤이어 어머니도 동생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따라갔다. 아들은 아버지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아비가 되었다.

아버지의 비이성적인 분노의 까닭을 아들이 알게 된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도 여러해가 지난 뒤였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열여덟살이었던 아버지는 인민군에 붙잡혔다. “동무! 의용군 가라우!” 열여덟살짜리가 말했다. “안 가!” 그는 기독교인이었다.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던 김천 형무소 담벼락에서 그가 총살당할 순간에, 미군 비행기가 그곳을 폭격했다. 아수라장 속에서 열여덟살은 살아남았다. 그 후 국군에 입대한 그는 모슬포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전쟁 끝자락에 백마고지에서도 싸웠다고 했다. 그렇게 공산군과 싸우던 청년은 제대 후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은 멀리했다. 6·25세대 목사와 5·18세대 철학자가 서로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아버지 역시 신앙을 버린 아들이 마뜩잖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가끔 부자지간에 친밀한 순간이 없지는 않았다. 그날은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을 믿는 아버지는 무사태평이었다. “북한이 남한을 향해 장사정포의 포문을 여는 순간 0.5초 만에 미국이 북한을 초토화시킬 거다.” 아버지의 눈이 백마고지 달빛 아래 총검처럼 번뜩였다.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가르치는 목사잖아요.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고 아버지는 평화를 설교하셔야 되잖아요.”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봄날처럼 화사해지면서 눈가에 계면쩍은 웃음이 번졌다. “그건 네 말이 맞다.” 신앙의 신비여! 창밖에는 고요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난 2년여 동안 문재인 정부가 추구해온 평화정책은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 것처럼 보인다. 애초 우리가 미국을 설득하여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은 일본을 설득하여 독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일본이 한반도 침략의 야심을 버린 적이 없듯이, 미국 역시 한반도 분할 정책을 포기한 적이 없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통치를 반성하지 않듯이, 미국도 한반도의 분단을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지난 2년 동안 우리 정부 평화정책의 성과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냉혹한 진실을 또렷이 깨달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미국에 한반도 평화를 구걸할 것이 아니고, 한반도 평화를 방해하는 미국을 불편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집요하게. 지소미아도, 방위비 협상도, 사드 문제도, 모두 아쉬운 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과격하게 반미를 외치지 않아도, 웃으면서 미국을 괴롭힐 수 있는 카드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게 두렵다면 미국의 하수인인 일본만 불편하게 해도 된다. 그렇게 다정하게 상대방의 등에 칼을 꽂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른바 선진국에서 배운 외교의 지혜 아니던가?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미국을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우리 스스로 개성공단도 열고 철도와 도로도 연결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켜나가면서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켜나가는 과정에 그들도 동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에서 내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한반도 평화에 대한 확고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미국은 한국이 설득해서 바꿀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설득할 수 있고 또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내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정직해져야 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 평화를 외치는 많은 사람이 6·25를 겪은 아버지들의 트라우마를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한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북한 정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당한 공포와 반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남한 시민들을 ‘북맹’이라 꾸짖으면서 가르치려고만 든다. 이것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미국이 이성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듯이 북한 역시 정상 국가가 아니다. 더러 북한을 베트남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베트남에 대한 모욕이다. 호찌민은 기독교인이든 민족주의자든 아니면 극좌파든 소수민족이든 생각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를 낮추어 모두를 껴안고 그 단결된 힘으로 끝내 외세와 싸워 이겼다. 그러나 북한의 헌법 서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라고 시작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 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헌법이다”로 끝난다. 저밖에 모르는 완벽한 홀로주체성이다. 그러면서 “김일성동지께서는 … 온 사회를 일심단결된 하나의 대가정으로 전변시키시었다”고 찬양하고 있다. 이렇게 가족 공동체로 퇴행한 나라도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왕도정치 이상을 추구하는 군주국일 수는 있어도 3·1운동 이후 겨레가 합의한 국가체제인 공화국일 수는 없다. 하물며 독재에 저항한 처절한 항쟁의 역사를 살아온 남한의 민주 시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는 더욱 아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그걸 두고 다툴 일은 없다.

그럼에도 내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하는 희대의 이단 사이비 목사가 주도하는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의 평화정책을 의심의 눈으로 보면서, 아들에게 물었을 것이다. ‘너는 지금 정부가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거라고 믿느냐?’ 쓸데없는 의심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무모하게 북한 체제를 두둔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의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과 또다시 전쟁이 난다면 한반도 동남쪽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원자력발전소들이 핵폭탄이 될 것이다. 베트남이 치열한 토론 끝에 원전 건설을 공식적으로 포기한 이유가 단지 환경만이 아니라 군사적 고려 때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우리는 원자폭탄을 이미 수십개나 지어버렸으니, 평화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우리가 먼저 설득해야 할 대상은 미국과 일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김상봉 ㅣ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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