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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상봉, 씨알의 철학] 영혼 없는 정치 아래서

등록 2020-04-07 18:07수정 2020-04-08 02:37

김종인씨가 프로야구 감독이 이 구단 저 구단 옮기듯이 이 정당 저 정당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정치가 더는 예전과 같은 문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건이다.

그것은 메시아가 사라진 한국 정치에 선거 청부업자가 등장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 주 뒤로 다가온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가 18살로 바뀐 뒤에 처음 치러지는 선거다. 만 18살 유권자들 가운데 일부는 고등학생이다. 입시공부에 매여 나라 걱정까지 할 여유 없이 자라온 많은 새내기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갈 때, 과연 그들은 어떤 판단 기준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 세상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고등학생이 한 사람 있어서, 인터넷에서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 있나 하고 찾아본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그 학생이 어디서 누구의 어떤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정치적 판단의 척도로 삼을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내가 이 나라에서 배운 어른으로 살고 있는 것이 몹시 부끄러워진다. 지난 몇 달 동안 언론에 오르내린 그 많은 정치적 발언들 가운데, 편견 없이 자란 고등학생이 투표장에서 판단 기준으로 삼을 만한 말이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 아니 그들을 위해 진지하게 조언하는 발언을 한 사람이 있기는 있었던가?

아마도 새내기 유권자들이 가장 자주 접하는 조언이 있다면 그것은 ‘무슨 당만 빼고’ 또는 ‘거대 양당 심판’ 같은 것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종류의 발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나 척도를 주기보다 결론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건강한 정치적 이성의 도야에 해로우며, 게다가 그렇게 강요되는 결론이 기성세대의 당파적 적대성과 증오를 맹목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대물림한다는 점에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번 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마주한 위험은 단지 새롭게 투표에 참여하는 새내기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은 기성세대 역시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정치적 환경에서 투표장에 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 정치적 선택의 기준도 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내기든 기성세대든 우리 모두는 이번 선거에서 정치적 선택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받고 있다.

하지만 거대 양당이 모두 똑같이 부패한 기득권 정당이라고 비판해온 사람들은 어쩌면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의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김종인씨가 미래통합당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변신한 것을 가리키며, 같은 사람이 이 당 갔다 저 당 가는 세상에 도대체 무엇이 변했느냐고 내게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맞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도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재벌과 학벌이 그리고 법원과 검찰과 언론이 법을 비웃으며 왕 노릇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거대 양당이 모두 부패 기득권 정당이고, 이 당 저 당 가릴 것 없이 국회의원들 모두 도둑이라 하자. 박근혜 정부나 문재인 정부나 똑같이 부패했다고 치자. 아니 더한 말이라도 상관없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부보다 더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하자. 그 부패와 무능 때문에 앞으로 경제는 파탄 나고, 코로나19로 수만명씩 죽어 나갈 거라고 하자.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야당이 의석 많이 얻어 문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말하면 될까? 무슨 상관인가? 나라를 맡길 수 없을 만큼 무능하고, 용납할 수 없는 불법을 저질렀으면 탄핵하면 되지. 그런 일 처음 겪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내가 우리나라 정치 환경이 근본에서 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다. 김종인씨가 프로야구 감독이 이 구단 저 구단 옮기듯이 이 정당 저 정당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정치가 더는 예전과 같은 문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건이다. 그것은 메시아가 사라진 한국 정치에 선거 청부업자가 등장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유능한 선거브로커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어떤 정당의 정신과 이념의 구현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라면 이 당 저 당 다니며 선거 용역사업을 떠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에 따르면 영혼은 형상이다. 아무 생각이 없으니, 아무 형상이 없고, 아무 형상이 없으니 어제는 이 당 오늘은 저 당 가리지 않고 자기를 끼워 맞춰 용역사업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선거브로커 얼굴을 보고 정당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홍보대행업자가 아니라면 누구를 보고, 아니 무엇을 보고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 모두가 직면한 곤경이다.

30년 전이라면 이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는 모든 정당에 하나씩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의 정당은 대부분 한 사람을 위한 정당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사람을 대통령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정당이었다. 이승만의 자유당부터 박정희의 공화당과 전두환의 민정당을 거쳐 이른바 3김 시대의 정당들이 모두 예외 없이 그런 의미의 보스 정당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 보스가 정당 선택의 기준이 되었다. 유권자들은 정당의 이름이나 정책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고 그의 정당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아무리 미래통합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도 그 당이 황교안 대표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있는 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이번 선거에서 낙선한다면, 보긴 해야겠지만 다른 사람이 당의 얼굴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2년의 임기를 남겨둔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당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당 역시 선거가 끝나면 문재인 대통령 다음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정당에 이제 예전 같은 주인은 없다. 그럼 무얼 보고 어떤 당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책 그리고 정당이 수행해온 일을 보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한국 정치의 본질적 진보와 시민의 내적 성숙의 결과이다. 오랜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통해 이제 우리도 개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나라와 세계에 대한 보편적 뜻과 이상이 정당정치를 움직이는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선거를 1주일 앞두고 모든 정당에 간곡하게 부탁한다. 처음 투표하는 당신들의 자녀를 위해 이제 당신들이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말해다오. 당신들의 자녀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지를 알려다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당신들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 자랑해다오. 제발 남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해다오. 당신들이 좀비가 아니고 영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당신들의 형상을 우리에게 보여다오. 당신들 영혼의 깊은 내면에 정녕 우리에게 떳떳이 보여줄 아름다운 형상이 아직 남아 있다면.

김상봉 ㅣ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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