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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내 친구의 이름은 무인주문기 / 이명석

등록 2020-01-03 17:56수정 2020-01-04 14:18

사람을 대체하고 있는 무인주문기는 사람과 접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젊은 세대에게는 유용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주문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게티 이미지뱅크
사람을 대체하고 있는 무인주문기는 사람과 접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젊은 세대에게는 유용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주문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게티 이미지뱅크

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대는 운동을 했다. 장소는 서울역이었고, 햄버거 가게가 기회를 제공했다. 아침을 거르고 역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빠듯해 패스트푸드 가게에 들어갔다. 이제는 낯설지 않은 무인주문기 앞에 섰다. 그런데 안경을 바꿔서일까, 화면이 복잡해졌나? 한참을 헤매도 원하는 메뉴를 찾지 못했다. 급한 김에 대충 골랐더니 뭔가를 추가하라며 자꾸 물어봤다. 취소를 눌렀더니 첫 화면으로 돌아갔다. 이러기를 몇번째, 출발 시간은 째깍째깍. 나는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이세돌과 인공지능의 싸움에 버금가는 혈투를 벌였고, 햄버거를 받아 전력 질주했다.

나는 원래 무인주문기라는 친구를 아주 반겼다. 익숙하지 않은 식당에서 점원을 앞에 두고 곧바로 메뉴를 고르는 일은 쉽지 않다. 잠깐 버벅대면 점원의 눈치를 보게 되고, 뒤에 선 손님에게도 미안하다. 시끄러운 매장에서는 주문이 어긋나는 경우도 빈번하다. 그러나 무인주문기는 침착하게 나를 기다리고, 메뉴의 종류와 가격을 정확히 확인해준다. 나의 변덕으로 주문을 취소해도 전혀 미안하지 않다. 하지만 이 기계가 모두에게 상냥한 친구는 아니었다.

얼마 뒤 다시 그 가게를 찾았다. 지난 주문 때 받은 쿠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게에 들어서자 아차 했다. 무인주문기가 쿠폰을 받아줄까? 좋은 소식, 인간 점원이 서 있는 주문대가 있었다. 나쁜 소식, 딱 하나였다. 나는 긴 줄 뒤에 서서 생각했다. 누가 이 줄에 설까? 기계에 서툰 노인, 키 작은 아이, 신용카드가 없는 사람, 한국어를 못 읽는 외국인, 앞을 보기 어려운 사람… 그들 중의 누군가는 기차 시간에 쫓겨, 너무 빠른 문명에 뒤처져 끼니를 포기할 것이다.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햄버거를 받았고, 일부러 무인주문기 뒤쪽에 앉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능숙하게 내 친구를 다루는지, 혹시나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노인이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영상통화 중인 스마트폰을 세워놓았는데, 화면 속에서 손녀 같은 여성이 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시 노인을 보니 그도 마찬가지. 아마도 수화를 하는 것 같았다. 노인은 그 통화를 끊더니 다시 여러 버튼을 재빨리 눌렀다. 이번엔 화면에 포장마차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나왔다. 역시 수화를 나누다가, 노인이 쇼핑 봉투에서 파카를 꺼내 입는 시늉을 했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네 옷 샀어. 금방 가져갈게.”

여기 문명의 서로 다른 얼굴이 있다. 눈이 어두운 이에게 무인주문기는 절망의 문턱이다. 하지만 귀가 나쁜 이에겐 구원의 계단이다. 수화를 하는 노인은 예전이라면 거기 앉아 햄버거를 먹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노인 세대들이 스마트폰을 어려워하는 건 명확한 사실이다. 하지만 몇년 사이 유튜브, 에스엔에스(SNS), 영상통화에 맛들인 노년층이 부쩍 늘어났다. 왜 무인주문기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없을까?

피시방, 간이식당, 버스터미널, 심지어 병원까지 무인주문기들이 착착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그 얼굴은 여전히 꾀죄죄하다. 단지 인건비를 줄이고 하나라도 더 끼워 팔려는 기계라면 그처럼 무뚝뚝하고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이런 의심까지 든다. 혹시 귀찮고 약한 사람들을 일부러 배제하려고 저렇게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우리에겐 바라건대 다른 ‘평행 우주’가 있다. 지치고 배고플 때 그 얼굴만 봐도 안심이 되는 무인주문기, 낮게 무릎 꿇고 꼭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 무인주문기, 자신이 도와줄 수 없는 때 친절하게 인간 주문대로 안내하는 무인주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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