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ㅣ 성공회대 초빙교수
정장 차림의 말쑥한 두 노인이 전철 안에서 싸움이 붙었다. 서로 멱살을 붙잡고 주먹을 날릴 태세였다. 일단 말리고 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한 노인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노인이 왜 거기에 앉아 있느냐고 한마디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러자 앉아 있던 노인은 임산부가 오면 비켜줄 텐데 웬 참견이냐고 대들었고, 이에 서 있던 노인은 원칙을 내세우며 질책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감정이 격해지면서 주먹다짐으로 비화된 것이다.
전철에서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가끔 시비가 붙는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이동 공간으로서 인구 밀도와 접촉 빈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용자 가운데는 고단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이 많다. 짜증 나는 일상에 쫓기며 움직이다 보면 작은 갈등이 큰 싸움으로 비화하기 쉽다. 제어되지 않은 폭력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말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선뜻 나서기가 어렵다.
몇개월 전에 전철역 플랫폼에서 난동을 부리는 취객을 ‘포옹'으로 진정시킨 청년의 모습이 유튜브에 올라와 누리꾼들의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술에 취해 발음도 잘 못 하는 남성은 누군가를 향해 울분에 찬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경찰 두명이 제지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고함을 지른다. 그때 뒤쪽 의자에 앉아 있던 어떤 청년이 불쑥 다가가 남성을 온몸으로 껴안고 구석으로 밀고 간다. 그러자 거칠었던 몸짓과 언성이 수그러들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마치 설움에 복받치다가 엄마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영상을 보면서 몇해 전 전철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차에 오르니 약간 술에 취한 남자가 어떤 아주머니에게 욕을 해대고 있었다. 처음에 어떻게 시비가 붙었는지 모르지만 남자는 무척 자존심이 상한 듯했고 거칠게 공격했다. 아주머니는 무시하려다가 참을 수 없는 언사에 몇마디 대꾸했다. 이에 남자는 더욱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 같았다.
나는 남자를 가로막고 진정시키면서 화제를 돌렸다. 어디에 다녀오시는 길이냐고 물으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힘든 노동을 하고 귀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말문을 열더니 사는 게 너무 힘들다면서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조용히 경청하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덧붙이니 말을 계속 이어갔고 조금 전의 싸움은 잊은 듯했다. 그는 목적지에 이르자 하차를 하며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내게 인사를 했다.
익명의 도시 공간에서 다툼이 생길 때 주변 사람들은 방관자로 머물기 일쑤다. 어설프게 끼어들면 자기도 말려들어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관찰과 경험에 비춰볼 때 타이밍이 중요하다.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기 전에 개입하여 흥분을 가라앉히고 격리시켜야 한다. 사실 당사자들도 누군가가 나서서 말려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험한 말로 상대방을 위협하지만 먼저 때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먼저 물러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갈등은 거의 다 사소한 일에서 촉발된다. 분노의 저변에는 온갖 부정적 감정이 깔려 있다. 서글픔, 외로움, 자괴감, 수치심, 모멸감, 불안… 그 응어리가 느닷없는 공격성으로 표출될 때 유튜브에 등장한 용기 있는 청년처럼 연민의 손길을 내밀어보자.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상대방을 측은지심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고통을 품어주는 이웃의 눈길 덕분에 분노한 자신과 화해하는 틈이 열릴 수 있다. 타인의 괴로움에 동참하는 시민들의 용기로 우리의 삶터는 좀 더 안온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