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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상봉, 씨알의 철학] ‘자유시민 그러나 경제노예’를 위한 민주화

등록 2020-01-14 18:08수정 2020-01-15 02:38

사악한 세상에서 살다 보면 가끔 위선조차 아쉽고 그리울 때가 있다. 위선이 나쁘다지만 위악보다는 낫고, 함석헌이 말했듯이 가짜는 진짜의 전조이다.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 경제 민주화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선거를 몇번 치르는 과정에서 참신성이 떨어진다 생각해서인지, 이즈음 와서 그 구호는 까맣게 잊힌 말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 구호가 처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다른 곳도 아니고 박근혜 선거캠프였는데, 생각하면 박근혜와 경제 민주화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가짜였고 위선이었으니, 그렇게 폐기처분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돌아보면 이미 그 시절에도 경제 민주화란 공허한 구호만 있었지 내용은 없었다. 그러나 그 구호 자체는 거부하기 어려운 객관적 절박함이 있었으므로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도 경제 민주화의 글자만 바꾸어 경제 민주주의를 내세웠었다. 하지만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는 박근혜가 내세운 경제 민주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무렵 경제학자들 역시 정치권에서 경제 민주화를 마치 자명한 경제학적 범주인 것처럼 입에 올리는 것을 듣고는 자기들끼리 토론도 하고 정치권에 훈수를 두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정당의 선거 구호처럼 대중에게 가닿지 않았다. 학자들은 아는 것이 많고 각자의 전문적 식견에 따라 입장의 차이도 크기 때문에 자연히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때때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돌아보면 경제 민주주의라는 구호도 그런 식이었는데, 선거 구호는 아무 내용이 없었고, 학자들의 토론은 너무 내용이 많았으므로,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서 공론화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엄밀하게 개념을 규정하자면, 우리가 잘 아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그냥 경제에 적용하면 그게 경제적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의 원조인 고대 그리스 사회로 돌아가 생각하면 민주주의는 이소노미아(isonomia), 곧 모든 시민의 ‘동등한 권리’에 존립한다. 그러니까 정치적 주체의 동등권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면, 경제적 민주주의란 경제적 주체들 사이의 동등권에 존립한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같은 이치를 우리의 헌법 제1조를 가지고 설명하면 이렇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데 존립한다. 통치권은 사사로운 특권이 아니고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다. 여기서 권력이란 정치권력 또는 국가권력을 의미한다. 그런 한에서 저 헌법 조문은 단지 정치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천명한 것이요, 그 자체로서는 아직 경제주체들 사이의 동등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재벌기업 총수와 노동자 사이에 동등한 권리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재벌 총수와 노동자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같다. 이런 사정은 재벌기업과 협력업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한국의 경제질서 속에서 원청업체와 하청업체가 서로 간에 동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정은 한쪽은 갑이고 한쪽은 을이라는 표현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데, 오죽하면 ‘갑질’이라는 낱말이 전 국민의 일상용어가 되었겠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 경제를 ‘민주화’한다는 것은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들 사이의 동등권을 경제적 주체들에게도 원칙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치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듯이 경제권력 역시 모든 경제주체로부터 나온다는 원칙을 실현하는 것, 그것이 경제 민주화의 원리인 것이다. 같은 말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경제의 영역에서 독재를 타도하는 것이야말로 경제 민주화의 핵심이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그에 비하면 경제 민주화를 입에 올리면서 과거 박근혜 캠프처럼 뜬금없이 “지도자의 의지”를 강조하거나, 문재인 캠프처럼 “양보와 타협”을 내세우거나, 한국경제연구원처럼 “공정성과 형평성”을 말하는 것은 모두 경제의 민주주의와는 큰 상관도 없는 공허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 아래에서 지도자의 의지나 양보와 타협을 말하는 것이 정치적 민주화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경제의 영역에서 타도되어야 할 독재는 무엇이며, 실현되어야 할 경제주체의 동등권은 또 무엇인가? 좁은 지면에서 어쩔 수 없이 증명 근거를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타도되어야 할 독재는 기업의 독재이며, 실현되어야 할 동등권은 노동자의 동등권이다. 생각하면 한국의 기업은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사장을 노동자가 선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북한처럼 경영권을 세습하는 것이 한국 기업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업 지배구조 아래에서 종업원들이 기업의 임금노예로 전락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면 이런 기업이 독재적인 조직이 아니라면 무엇이 독재적인 조직이겠는가?

경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그렇게 독재적인 기업의 지배구조를 민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기업의 지배권력을 내부 구성원들에 의한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쉽게 말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국민이 선출하는 것이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천이라면, 기업의 대표이사나 이사진을 종업원이 선출하는 것이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인 것이다.

이것은, 한겨레신문사에서 사장을 종업원들이 선출하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불가능한 일도 불합리한 일도 아니다. 한겨레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울시에서 시작된 산하 공기업과 투자출연기관의 노동이사제도 역시 경제 민주화를 위한 의미 있는 시도이다. 그렇다면 주식회사의 사외이사를 종업원들이 추천하는 것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이 기업의 의사결정기구에 자신의 대표를 파견할 수 있는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받는다면, 기업은 사적 소유물에서 민주공화국을 닮아갈 것이며, 노동자들 역시 기업의 임금노예에서 기업의 시민에 가까워지지 않겠는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우리 모두의 자랑이다. 하지만 정치는 민주화되었으나 경제는 전혀 민주화되지 않은 까닭에 우리는 선거 때만 자유로운 시민일 뿐, 평소에는 일터에서 임금노예로 살아간다.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는 이제 경제의 민주화를 향해 걸음을 옮길 때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을 위해 다음 글부터 경제 민주주의의 이론과 역사를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려 한다.

김상봉 ㅣ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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