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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김정은 혹은 ‘불행한 의식’ / 고명섭

등록 2020-01-23 15:56수정 2020-01-24 02:37

고명섭 ㅣ 논설위원

‘불행한 의식’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인간 정신의 발전 과정을 묘사하며 쓴 말이다. 정신이 온전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서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불행한 의식’의 단계다. 자유를 얻으려고 분투하는 인간은 현실의 장벽에 막혀 불가피하게 좌절의 시간을 겪는다. 인간은 드높은 이상과 비루한 현실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인 분열을 겪으며 자기와 다투고 자기와 싸운다. 그것이 불행한 의식이다. 사르트르는 헤겔의 논의를 이어받아 <존재와 무>에서 ‘불행한 의식’을 인간에게 선고된 영원한 실존의 형벌로 규정했다. 인간은 온전히 자유롭고 온전히 자족적인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꿈꾸지만, 이런 완전성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자기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인간은 결핍된 존재이며, 이 결핍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다.

북한 체제를 이끌어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한 작금의 딜레마야말로 이 ‘불행한 의식’의 표본이라고 할 만하다. 2012년 집권 이후 김정은의 목표는 체제 보전과 경제발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체제 안전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김정은이 택한 것이 핵 개발이었다. 동시에 김정은은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도록’ 경제발전에 몰두했다. 그러나 두 가지 욕망은 동시에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다. 이 딜레마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과의 전면적인 비핵화 협상을 탈출구로 택했다. 하지만 ‘제재 해제가 먼저냐, 비핵화가 먼저냐’를 두고 북한은 미국과 지난 1년 동안 소득 없는 줄다리기만 계속했다. 미국은 제재로 옥죄면 언젠가는 북한이 손들고 나올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갈 길이 먼 김정은에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김정은이 처한 이런 딜레마를 보여준 것이 지난해 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였다. 여기서 북한은 ‘정면돌파전’을 결의했지만 “정면돌파전의 기본전선은 경제전선”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새로운 길’이 과거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내비쳤다. 북-미 관계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김정은의 딜레마는 올해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에서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지도했다고 1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2020.1.1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에서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지도했다고 1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2020.1.1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미 대치의 장기화는 북한에만 불행인 것이 아니다. 북-미 비핵화 협상의 촉진자를 자임해온 남쪽 정부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북한은 북-미 협상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며, 지난해 내내 남북관계를 단절 상태로 몰아갔다. ‘하노이 결렬’의 실망감이 쌓인 탓도 있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남쪽 정부가 북-미 협상에서 북쪽 편에 서달라는 일종의 압박 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쪽도 남쪽대로 북-미 협상이 성공하길 바라며 미국의 심기를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남북협력 사업에 대한 미국의 제동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미국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시늉까지 했다. 남도 북도 북-미 대화에 다걸기를 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그 결과가 아무것도 없었으니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의 표현대로 “남과 북이 함께 미국에 당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6월30일 오후 판문점 남쪽 자유의 집에서 회동을 마친 뒤 함께 군사분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6월30일 오후 판문점 남쪽 자유의 집에서 회동을 마친 뒤 함께 군사분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사르트르는 불행한 의식을 인간 존재의 극복할 수 없는 근본 조건으로 보았지만, 이런 존재론적인 차원을 떠나 현실 자체를 본다면 이 의식은 어찌해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경제발전과 체제보장의 동시 실현은 미국이 제재를 틀어쥐고 북한의 굴복을 강요하는 상황에서는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요구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이 태도를 바꾼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미국이 스스로 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남한이 제3의 힘으로 개입해, 대립하는 두 힘을 중화하는 길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북·미 양극 사이에 끼어들어 두 힘의 벡터를 대결에서 대화로 바꾸는 ‘특이점’ 구실을 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협력의 길을 뚫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남북관계의 일대 전환으로 제재의 틀을 흔들면 미국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이 현실적인 방안을 들고 북-미 협상 테이블로 나오는 상황을 만들려면 먼저 남한의 협력 제안에 북한이 호응해야 한다. 김정은의 불행은 문재인의 불행이며 한반도의 불행이다. 이 불행을 끝내야 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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