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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해리스 대사의 ‘딴지’ / 박병수

등록 2020-01-30 18:25수정 2020-01-31 08:53

박병수

논설위원

정부 수립 이후 70여년 동안 많은 주한 미국대사가 있었지만, 해리 해리스 현 대사처럼 입길에 자주 오른 이도 드물다. 외교관답지 않게 직설적이고 고압적인 언행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이 벌써 몇차례 된다. 태평양사령관 출신이어서 외교 문법에 익숙지 않은 탓일 것이라는 추정이 종종 덧붙여지곤 하지만, 미국에서 국무장관 등 외교 업무를 별 논란 없이 수행한 군 출신 인사가 적지 않은 걸 생각하면 그렇게 덮을 수 있는 일만도 아닌 것 같다.

가장 최근에 논란이 된 해리스 대사의 직설화법은 그가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협력 추진 움직임을 겨냥해 “문 대통령의 낙관론은 고무적이지만, 낙관론에 근거해 행동할 때에는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고 ‘딴지’를 건 발언이다. 당시 정부는 “대북정책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속한다”고 발끈했지만, 미 국무부는 논평을 요구받자 “해리스 대사를 신뢰한다”고 뭉갰다. 그렇게 논란은 잦아들었지만 ‘미국의 논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1989년 말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최호중 외교부 장관에게 친서를 보냈다. … 미국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할 테니, 한국은 일방적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는 요지였다.” 당시 미국이 우려한 한국의 ‘일방적 행동’은 독자적인 핵 개발이나 군사 행동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우려 대상’이 지금은 ‘남북 간 교류·협력’으로 바뀐 사실에서 지난 30여년 세월의 변화가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전혀 바뀌지 않은 게 있다. ‘미국이 알아서 할 테니, 한국은 딴짓 말고 내 뒤만 따라오라’는 강자의 논리와 사고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1월 15일 청와대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와 악수하고 있다. 해리스 대사는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의 청와대 예방에 동행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9.11.15. 한겨레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1월 15일 청와대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와 악수하고 있다. 해리스 대사는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의 청와대 예방에 동행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9.11.15. 한겨레 청와대사진기자단
어떻게 하든 문제가 해결된다면야 뭐가 그리 대수겠냐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30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그 결과 우리는 아직도 북핵의 문턱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만 믿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고만 되뇌는 건 도대체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일까, 되묻고 싶다.

한국의 역할이 더 유보될 이유가 없다. 정부는 남북 간 교류·협력을 하더라도 국제적인 대북제재의 틀 안에서 한다는 방침이다. 문 대통령이 이번 새해 기자회견에서 거론한 사례도 남북 개별관광과 접경지역 협력, 철도연결 사업, 스포츠 교류 정도다. 유엔의 예외적 승인이 필요한 분야도 있지만 대체로 유엔 제재를 준수하며 추진할 수 있는 내용이다. 미국이 이렇게 제한된 범위의 남북 간 교류와 협력 추진 계획에 대해서도 눈살부터 찌푸리는 건, 남북관계를 전적으로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만 종속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북 경제제재가 느슨해질 수 있다는 미국의 우려를 이해 못 할 건 없다. 그러나 제재 효과를 과신할 일이 아니라는 건, 그동안 제재를 버텨온 북한의 생존사에서 입증된다. 북한이 제재로 고통받는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얼마 전 “정면돌파전에서 기본전선은 경제전선”이라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통스럽다고 다 제재에 굴복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둘 사이엔 간극이 있다.

미국의 정책들 사이에 충돌도 있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강화하고 있는 건, 세계 패권 유지에 필요할지 몰라도 중국을 대북제재 전선에서 이탈하게 하는 유인이다. 미-중 관계가 험악해질수록 중국의 입장에서 국경을 맞댄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의 협조 없이 대북제재가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미국은 세계 패권 전략 자체에 대북제재의 효과를 억제하는 요소가 내재한다는 역설적인 상황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정부의 이번 남북협력 추진에 북한이 전향적으로 호응했으면 좋겠다. 도도한 물줄기도 작은 물방울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그렇게 남북 간 교류의 물꼬가 터져, 너른 바다로 가는 항해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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