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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검은 뽑기의 블루스 / 이명석

등록 2020-02-07 18:31수정 2020-02-08 02:33

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어릴 적 동네 구멍가게에 뽑기 게임판이 들어왔다. 마법의 성이 그려진 크고 아름다운 판이었다. 동전을 내면 번호 종이를 떼어 숨은 상품을 탈 수 있었는데, 대부분 과자나 연필 따위의 시시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1등 상품만은 굉장했다. 행운만 따라준다면 동전 하나로 마법의 성 모형을 얻을 수 있었다. 용감한 아이들이 먼저 동전을 내던졌고, 화투짝처럼 종이를 쪼아보았고, 씁쓸한 입맛을 막대사탕으로 달랬다.

나는 함부로 덤비지 않았다. 분명 얄팍한 속임수야.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과연 1등은 누가 뽑아갈까? 가게에 갈 때마다 흘깃흘깃 번호가 줄어드는 걸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절반 정도가 떨어져 나간 뽑기판 앞에 섰다. 혹시 모르잖아? 딱 하나만 뽑아보자. 잠시 후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나를 찾으러 온 누나의 호주머니까지 털었다. 너무 분했다. 왜 안 나오는 거지? 집에서 돼지저금통을 들고 와 모두 부었다. 마지막까지 1등은 나오지 않았다.

“사는 게 그런 거다.” 가게 주인이 무안해하며 말했다. 그 뜻은 어른이 되며 차차 깨달았다. 나는 살아가면서 이런 뽑기를 거듭해야 했다. 이미 태어나면서 어떤 몸뚱어리를 뽑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직장을 뽑고, 살 집을 뽑고, 사람을 뽑아야 했다. 세상은 말한다. 어디엔가 인생을 바꿀 만한 행운의 뽑기가 있다고. 누구네 낡은 아파트가 재개발된다네, 누가 산 주식이 대박이 났네, 누구의 책이 방송을 타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네.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이 뽑아낸 것들은 변변찮다.

그런 시답잖은 뽑기 인생을 통과한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났다. 길게는 이십년 넘게 못 본 사이다. 직업도 취향도 관심사도 달라 대화는 겉돌았다. 그러다 자연스레 하나의 소재로 모여들었다. “너는 언제부터 정수리가 반들반들해졌니?” “그러는 너는, 눈 밑이 판다 저리 가라네.” “나 웃을 때 표정이 좀 그렇지 않아? 안면마비가 와서 한동안 고생했어.” “나는 밤에 화장실에 세번씩 간다. 좀 있으면 기저귀 차야 돼.” “사실, 나 항암 치료 중이다.” 잠시 침묵. “다들 보험은 들어놨니?”

우리의 뽑기판은 색이 바래더니 까맣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느 출판사에 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사장님이 말했다. “아직은 괜찮은 나이죠. 10년 뒤엔 더 굉장한 것들이 나올 겁니다.” 피부나 두발은 그러려니, 뼈나 관절은 당연히 나오고, 내장이 나오면 곤란하고, 뇌가 나오면 엠아르아이(MRI)를 찍고 쪼아보아야 한다. “안 뽑으면 안 되나요? 돈 안 내고요.” “계속 뽑아야 돼요. 돈을 아주 많이 내면서요.”

나는 닥쳐올 ‘검은 뽑기’의 공습을 두려워하며 이불 속에서 뒤척거렸다. 그러다 깨달았다. 어릴 때 구멍가게에서 골랐던 뽑기들은 시시했지만 나쁜 건 없었다. 내가 살아오며 만난 사람, 체험한 일, 재정적 투자, 지적 시도 중에 인생을 바꿀 만큼 굉장한 건 없었다. 후회할 만한 일도, 손해 보았다 싶은 것도 적지 않다. ‘그놈만 안 만났으면’의 그놈도 있다. 하지만 시시하고 작지만 어쨌든 좋은 뽑기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춤과 큰 소리의 음악을 즐기다, 몇해 전 이명(耳鳴)을 얻었다. 불면으로 이어지는 아주 까만 뽑기다. 죽기 전까진 털어낼 방법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불안을 잠재울 방법도 음악을 통해 얻었다. 블루스라는 음악은 말한다. 세상에는 절대 집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우환이 있다. 그런데 블루스는 그걸 쓸고 모아 집 한쪽 구석에 모아둔다. 그러면 참고 다룰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인생은 이렇게 작지만 좋은 뽑기들을 모아 불가항력으로 덮쳐오는 나쁜 뽑기들을 방어하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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