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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살고 살리기 위해서

등록 2020-03-01 18:46수정 2020-03-02 02:37

조해진 ㅣ 소설가

“친구보다는 동료가 좋고 동료보다는 동지가 좋다”고, 최근에 출간된 윤이형 소설 <붕대 감기>에 등장하는 여고생은 말한다. <붕대 감기>는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의 여성들이 저마다의 삶에 침투하는 차별과 억압을 경험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의 방식과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소설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살아오면서 ‘동지’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고 들은 기억도 없다. 소설에든 개인적인 편지에든 쓴 적도 없다. 이 단어에 덧입혀진 사상적 배경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촌스러운 느낌 때문인지 ‘목적이나 뜻이 같은 사람’이라는 그 의미의 근사함은 이미 오래전에 퇴색되어버린 듯하다.

그런데 최근에 코로나19와 관련된 기사와 뉴스를 연이어 보면서 나는 ‘동지’, 이 단어를 언뜻언뜻 떠올리곤 한다. 대구의사회의 요청에 생업을 잠시 중단하고 자진해서 대구로 내려간 의료진 소식이나 재고가 쌓인 식당과 커피숍 등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공유하며 앞다퉈 주문을 한다는 대구 시민 소식,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상점의 월세를 받지 않거나 삭감한다는 임대인 소식 등이 그렇다. 기업과 유명인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기부 소식도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어린 학생들도 ‘동지’ 행렬에서 빠지지 않았다.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최형빈과 이찬형군은 코로나19 현황과 선별진료소, 병상 등의 정보를 담은 웹사이트 코로나나우를 개설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견한데 그들은 배너 광고로 얻은 수익금을 마스크 구매에 써달라며 지자체에 기부까지 했다. 대견함을 넘어 존경심마저 일었다. 미안해서 더 애틋한 존경심…. 병원 밖 벤치에서 쪽잠을 자는 방역복 차림의 의사 사진을 보면서는 그 헌신적인 노동의 시간이, 코로나19의 감염 여부를 단시간에 확인할 수 있는 진단 키트가 개발됐다는 뉴스에는 내내 불이 켜져 있었을 연구원들의 밤의 연구소가 짐작되면서 우리가 모두 동지라는 걸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라도 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막아내고 감염된 경우엔 어떻게든 완치시키겠다는 뜻을 같이한 동지….

물론 동지의 무게를 함께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코로나19로 인한 혼란을 4월 총선에 이용하려 한다든지 문제 해결과 상관없이 상대 당이 사용한 특정 표현만 가져와 소모적인 논쟁을 일삼는 몇몇 정치인들, 감염 확산의 주범인데도 가장 큰 피해자임을 자처하며 신도들의 신상정보 공개에 소극적인 신천지 지도부와 확진 판정을 받았는데도 동선을 숨기거나 유동인구가 많은 곳을 활보해온 그 신자들, 마스크를 매점매석하여 폭리를 취하려는 유통업자들은 자신들은 그저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변명하고 말까. 서로 조심하고 있는데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혹은 입을 가리지도 않은 채 공공장소에서 마음껏 기침을 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에 침을 뱉는 사람들 역시 큰 뜻은 같지만 당장의 불편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억울해할지 모르겠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전염병에 맞서는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영웅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건 성실성의 문제예요. 비웃을지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제 임무를 다하는 동지들, ‘우리’이고 ‘우리’여야 하는 한 명 한 명이 영웅이어서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살기 위해서고 살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뜻이야말로 진정 영웅적이다. 모두가 품고 있는 이 진심 어린 뜻으로 코로나19가 어서 종식되기를, 그리고 오늘의 동지들 모두 부디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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