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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상봉, 씨알의 철학] 단밤포차의 미래

등록 2020-03-10 18:26수정 2020-03-11 02:38

경제민주화의 길 2

요새 내가 안 하던 짓을 한다. 드라마 하나를 꼬박꼬박 챙겨 보는 일이다. <이태원 클라쓰>인데, 이유는 하나다. 사랑도 복수도 식상한 주제지만, 주인공이 만들려는 새로운 회사에 대한 꿈이 특별하고, 소중하고 또 고맙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올해가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지 꼭 50년이 되는 해인데, 그의 꿈도 모범업체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좌절되었고, 그 좌절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사람이 떠나도 꿈은 남고, 그렇게 남은 꿈이 역사를 만든다. 그가 떠난 지 50년 뒤, 새로이 나타난 박새로이는 그가 꿈꾸는 회사를 만들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전태일은 모범업체를 설립할 자본을 마련할 수 없었다. 새로이는 장가의 집요한 방해와 농간에도 불구하고 토니의 할머니 덕분에 안정적으로 자본은 끌어올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만 있으면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모범업체가 그냥 만들어질까? 아니다. 그것은 건축자재가 다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건물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설계도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자재가 쌓여 있어도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지는 않는 것이다. 그럼, 새로이는 그런 설계도를 가지고 일을 시작한 걸까? 아니면 좌충우돌하면서 그 설계도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걸까? 나는 그게 몹시 궁금하다.

여러 사람이 모여 여러 사람의 투자를 받아 큰 사업을 벌이려면, 새로이는 일단 단밤포차를 개인사업체가 아닌 법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건 드라마에서 나온 것과 같다. 하지만 법인도 여러 종류이다. 만약 단밤포차가 협동조합법인이라면 몬드라곤 협동조합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매니저 조이서가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는 걸로 보아, 단밤은 협동조합이 아니라 주식회사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주주가 주인이라는 주식회사도 노동자가 사람대접받는 회사가 될 수 있는가? 회사가 커지면 단밤포차도 장가네와 똑같은 독재적 기업조직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아니라면 어떤 제도적 장치가 거대 기업의 종업원을 기업주의 머슴이 아니라 동료가 되고, 기업의 임금노예가 아니라 시민이 되게 만들 수 있을까?

독일의 경우라면 단밤포차는 다음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일단 종업원 수가 500명이 넘는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면 이사회의 3분의 1을 종업원들이 추천한 이사로 선임해야 할 것이다. 단밤포차가 더욱 성장해서 만약 2000명이 넘는 종업원이 일하는 대기업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이사진의 절반을 종업원들이 추천한 인사로 채워야 할 것이다. 이들은 주주를 대표하는 다른 이사들과 모든 면에서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종업원들의 이해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것이다.

그런데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실은 이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노사 공동결정 관련 법이 있는데, 그것이 1952년에 처음 제정된 ‘사업조직법’이다. 이 법은 법인기업의 이사회가 아니라 사업장에서 의사결정을 공동으로 하도록 제정된 법률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법률은 사업장 단위에서 노사가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설립하는 조직인 사업장 평의회를 어떻게 구성하며, 평의회가 어떤 권한을 어떻게 행사할 수 있는지를 촘촘하게 규정한 법률인 것이다.

원래 ‘사업장 평의회’(Betriebsrat)에서 평의회를 뜻하는 독일어 ‘라트’(Rat)는 러시아어 ‘소비에트’에 대응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독일의 사업장 평의회는 자본주의 경제질서 속에 뿌리내린 기업 내의 노동자 자치기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업조직법에 따르면 종업원이 5명 이상이면서 그 가운데 선거권자가 3명 이상인 사업장에서는 사업장 평의회를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매일 얼굴을 보며 같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의회라는 기구를 따로 만들어 노사가 협의를 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므로, 사업장의 규모에 비례해서 평의회 조직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마 단밤포차의 종업원이 20명이 넘어갈 무렵이면 십중팔구 종업원들이 평의회를 만들게 될 것이다. 회사는 그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

그런데 평의회는 종업원들로만 구성되지만 회사와 이해관계를 다투는 쟁의기구가 아니라 협의기구이고 공동결정기구이다. 임단협이나 파업 같은 것은 노동조합의 일인데, 독일에서 노동조합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별로 조직된다. 노사가 대립해 싸우는 것은 밖에서 단체로 하고 안에서는 웃으면서 같이 협의하고 결정해서 일하라는 뜻이다. 공동결정의 대상과 방식은 일의 성격과 종류에 따라 다른데, 예를 들면 회사는 작업 규정부터 평의회와 합의해서 정해야 한다. 남이 정한 규칙에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노예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 노동시간의 시작과 끝, 한주 노동시간의 배분, 연간 노동시간에서 휴가 기간까지 모두 공동결정의 대상이다. 만약 사업장에 종업원들을 감시·감독하기 위한 기술적 장비가 도입된다면 그것도 합의 아래 도입해야 한다. 사업장 내에서 작업 조건, 특히 종업원의 안전에 관련된 모든 작업 공정과 환경의 변화는 평의회와의 합의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실습 중인 고등학생이 작업 도중 숨진다거나 지하철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전동차를 피하지 못해 숨진다거나, 삼성에서 반도체를 만들다가 백혈병으로 숨지는 일이 없으려면, 작업 조건을 노동자들 자신도 규정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평의회가 동의를 해주어야 회사가 할 수 있는 일도 있는데, 채용, 전직, 해고 같은 인사문제에 관한 기본 지침은 평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국회의원 딸을 뒷문으로 채용할 수도 없고, 사장 눈 밖에 난 직원을 괴롭히겠다고 책상을 없애거나 본래 업무와 무관한 일에 배치할 수도 없다. 특히 종업원을 해고하는 것은 평의회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것이 독일 기업에서 일방적 정리해고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이유이다. 하지만 평의회가 해고를 요구할 수는 있다. 만약 단밤포차에 새로 들어온 직원들 가운데 누군가가 피부색 때문에 토니를 괴롭히거나, 트랜스젠더라고 주방장 마현이를 괴롭힌다면, 평의회는 가해자의 해고를 요구할 수 있다. 노동법원이 이 요구를 이유 있다고 받아들이면, 회사는 그를 해고해야 한다.

감독이사회가 기업의 행정부라면, 사업장 평의회는 의회와 같고, 중재위원회는 사법부와 같다. 이 셋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독일의 기업은 마치 하나의 민주공화국처럼 운영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물론 이 설계도는 남의 것이므로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그럼 단밤포차는 어떻게 될까? 이것이 내가 드라마를 계속 보는 이유이다.

김상봉 ㅣ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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