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섭 논설위원
코로나19 창궐의 진앙이 되고 만 신천지예수교는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교리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의 많은 종파가 성경의 비유와 상징을 중시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신천지의 경우엔 그 정도가 심하다. 신천지는 비유와 상징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할 뿐만 아니라 비유와 상징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신천지가 이만희 총회장 밑에 12지파를 둔 데서도 그런 특징이 드러난다. 12지파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12지파의 12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옛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념 속에 있던 상징적인 숫자를 뜻한다. 동아시아에서 12간지의 12가 상징성을 띤 숫자인 것과 다를 바 없다. 예수의 12제자라는 것도 그런 상징의 연장선상에 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의 제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70여명에 이르지만, 예수를 가까이 모신 제자는 시몬 베드로를 비롯해 서넛 정도다. 12사도의 12는 12지파의 영향을 받은 상징적인 숫자일 뿐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14만4000이라는 것도 이 12의 제곱에 1000을 곱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종말이 도래할 때 순교자 14만4000명이 살아나 천년왕국을 다스린다고 한다. 신천지는 이 말을 증거로 삼아 심판의 날에 신천지 신도 14만4000명이 구원받아 왕과 같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초기 기독교 박해 시기에 등장했던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은 책일 뿐이다. 환상과 소망으로 쓰인 문학작품을 직설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낳을 뿐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천국운동’을 이끈 사람이다. 그러나 이 천국은 신천지가 생각하는 천국과는 사뭇 다르다. 예수가 말한 천국, 곧 ‘하느님 나라’의 ‘나라’는 복음서가 쓰인 희랍어로는 ‘바실레이아’(basileia)다. 바실레이아는 보통 ‘왕국’이라고 번역되지만, 통치·지배·질서를 뜻하기도 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세상, 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된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가리킨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이 새로운 바실레이아가 도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은 이 땅에 신의 뜻에 따라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것이라는 얘기다. 예수는 체포되기 직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 권력자·율법학자들과 긴 논쟁을 벌인다. 논쟁의 말미에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묻는다. ‘그 많은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인가?’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율법학자는 한 가지를 물었는데 예수는 두 가지로 답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따로 나뉠 수 없는 하나라는 뜻이다.(도올 김용옥 <나는 예수입니다>) 천국운동의 목표는 불의 심판에서 살아남아 왕처럼 군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가장 비천한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천지의 포교 활동을 보면 사람을 섬기는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공격하고 파괴하는 정복자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추수꾼’을 심어 기존 교회 조직을 흔들고 목사와 신도를 이간질하여 교회를 통째로 접수하려는 데서는 무자비한 약탈 자본가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한다. 신천지는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환란에 처하게 된 상황에서도 조직을 보호하는 데만 급급해 수많은 시민에게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주었고,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자들을 아감벤이 말한 ‘추방당한 자들’의 처지로 몰아넣었다. 신천지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인연이 없는 사이비 기독교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기성 교회라고 해서 신천지의 이런 사이비성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재벌 총수가 기업체를 대물림하듯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한국의 대형교회 모습이다. 민중을 갈취하던 성전의 환전상과 다를 바 없다. 권세와 부를 뒤쫓는 대형교회 중심의 한국 기독교 문화 속에서 신천지 같은 괴기한 종파가 자라났다. 예수가 광야에서 외쳤던 메타노이아, ‘인식의 일대 전환’이 지금 한국 교회에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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