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ㅣ 소설가
최근 서울 구로구에 있는 손해보험 콜센터가 코로나19의 집단감염지가 되었다는 소식에 바이러스는 숙주의 소득과 재산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이론적인 팩트일 뿐,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너비가 1m밖에 안 되는 책상이라든지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황에서도 마스크를 쓸 수 없는 근무 환경이 감염을 야기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는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상상한다. 밀폐된 콜센터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감당해야 하는 노동의 질감에 대해, 그 사람의 처지만이 아니라 그 삶의 안쪽 감각까지…. 가령 전화기 저편 소비자의 하대와 무시를 감당해야 하는 순간, 혹은 욕설과 성희롱에 노출될 때 그 노동은 수치와 고통이 될 것이다. 통화 연결음에 가족 소개를 넣는 등의 캠페인으로 사정이 다소 나아졌다지만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깊은 회의와 절망이 밀려오기도 할 터이다. 김숨의 단편소설 ‘그 밤의 경숙’(<국수>, 창비)의 주인공 경숙 역시 콜센터 상담원인데, 그녀는 가정에서나 회사에서 늘 바쁘게 일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녀를 고유한 존재로 인지하는 인물은 없어 보인다. 경숙은 5번 목소리일 뿐,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으며 그녀 역시 다른 상담원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려는 의지와 여유를 갖지 못한다. 이 소설은 경숙이 차 안의 실내등을 끄며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의 얼굴을 지우는 장면으로 끝난다.
출근 전 녹즙을 배달한다든지 주말에 따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적은 급여를 보충한다는 구로 콜센터 직원들의 사연을 알게 되면서는, 권여선의 ‘손톱’(<아직 멀었다는 말>, 문학동네)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스포츠용품 매장의 직원인 소설 속 소희는 수시로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단돈 500원도 허투루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현재는 다친 손톱을 치료하는 돈마저 융통하기가 쉽지 않다. 가족의 배신으로 혼자 빚을 갚아야 하는 소설적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노동하며 사는데도 그 대가가 충분하지 않은데다 월세 상승 같은 외부적 요인으로 갑작스러운 지출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 생존이 타인에게 빚을 지면서 유지되며 그 빚진 마음은 선의가 아니라 도리, 나아가 사회적인 의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다르게 일하고 다르게 살아가며 다르게 대접받지만, 누군가의 건강과 편리는 위험을 감수한 또 다른 누군가의 노동이 있어서라는 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알고 있다. 다른 이의 위험과 노동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고 해서 사회구조가 바뀌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윤리적인 부채감은 때때로 무력한 자기 위안으로 수렴될 뿐이라는 것도. 그러나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아는 것을 전제해야 가능하지 않던가. 한 인간으로서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문장이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창비)에 적혀 있는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건강한 동안 한 사람이 병들었으므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한 사람이 죽어 있게 될 것이므로. (중략) 한 사람이 죽고, 그리하여 남아 있는 자들의 죽음이 보류되는 것이므로.”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전인 올해 초부터 나는 등단 16년 만에 순수한 의미의 전업작가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일상과 출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안온함이 부끄럽고 더 미안해지는 요즘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올빼미의 없음>의 문장들을 되새기며 날마다 새롭게 빚을 지는 내 삶을 나 역시 또 한번 돌아보게 된다. 위태로운 시절일수록 이런 문장들을 더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