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ㅣ문화부장
‘문빠가 언론 탄압하는 시대, 조선일보 없었다면 어쩔 뻔’했냐는 서민 단국대 교수의 문자화한 음성을 보는 순간 나는 놀라는 대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난해 펴낸 책 <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에 일종의 복선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서 교수는 이 책에서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규정하면서, 조선일보 방씨 일가를 피해자로 동정한다.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윤지오가 사기꾼이라는 데 동의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진 ‘삼인성호’(三人成虎)에 세뇌된 상태였다. 정치철학자 조정환의 <증언혐오>와 <까판의 문법>이라는 ‘빨간약’을 삼킨 뒤에야 나는 마녀사냥의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자연·윤지오 사건이 품고 있는 각각의 복잡한 사실과 주장을 여기서 다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한 윤지오의 증언은 흔들린 적이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윤지오가 인터폴 ‘적색 수배’를 받게 된 사건인 크라우드펀딩 ‘고펀드미’ 사기 혐의의 경우, 애초에 범죄의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기란 남을 속여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행위인데, 윤지오가 증언한 ‘장자연 리스트’는 분명히 존재했고, 윤지오가 이 리스트를 봤다는 사실이 관련자들의 진술 조서 등을 통해 명백히 드러나 있다. 장자연 사건 초동수사 당시 은폐에 가담했던 경찰이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고, 윤지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편승해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설령 윤지오가 사기꾼이 맞다고 하더라도 <조선일보>가 피해자가 될 수는 없다. 장자연이 목숨과 맞바꿨던 증언이 방씨 일가를 가해자로 지목하고 있다. 윤지오 사건과 관련해서도 방씨 일가는 피해자가 될 수 없다. 경찰과 검찰이 은폐한 진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단지 이름이 불리는 것만으로 그들을 피해자로 명명한다면 역사적인 ‘가해자-피해자 바꿔치기’ 사례로 남을 것이다.
서 교수가 감행하는 ‘정신적 축지법’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그가 ‘문빠’라고 부르는 극단적 온라인 행동주의자들과 만나게 된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괴물과 싸우다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그들로부터 서 교수가 심각한 공격을 받았고, 그들이 펼치는 ‘진영논리’의 폭력성에 질려, 맞서 싸우겠다고 작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 교수 자신이 또 다른 진영논리에 빠진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영논리의 특징은 팩트에 별 관심이 없으며, 메시지보다는 메신저를 중시하고 편부터 가르는 것인데, 서 교수가 윤지오 사건에 임하는 자세가 그러하다. 서 교수가 책에서 새로 밝혀낸 사실은 거의 없다. ‘까판’이라고 불리는 유명인 비판 계정들이 제기한 윤지오(메신저)의 학력 위조 의혹과 직업 사칭 논란을 비롯해, 과거를 캐는 내용을 정리한 수준에 불과하다. 증언자(피해자)는 결백해야 한다는 순수주의와 주류 기득권의 논리로 가득 차 있다. 조정환의 책이 나온 지 한참 됐는데도 언급조차 않는 걸 보면, 팩트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서 교수와 함께 ‘반진영논리’라는 새로운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인물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다. <문화방송>이 보도한 <채널에이> 기자의 협박성 취재가 뭔가 프레임을 걸고 있는 느낌이라며 검찰과 채널에이를 응원한다. 코로나19 방역 등 몇몇 사안에서는 여전히 정확한 진단을 내놓는 그가 검찰 관련 보도에서 이성을 잃는 이유는 검찰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를 무조건 옹호해온 전력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당성을 유지하려면 검찰을 비호할 수밖에 없게 돼버린 것이다. (여당 쪽이) 프레임을 걸고 있다는 진 전 교수의 말이 일말의 진실이라도 담고 있다면, 그의 시각 또한 (검찰 쪽) 프레임을 걸고 있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르지만, 어둠이 깊어질수록 지혜의 눈은 밝게 빛난다. 사후에(야) 말하는 지식인은 욕망과 정서에 호소하는 정치인과 달리 차가운 이성으로 사회를 ‘리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라쇼몽’의 세계에서 단선적 정의감처럼 위험한 도박은 없다. 반지성주의 집단에 맞서 싸운다는 지식인들이 반지성주의의 얼굴을 하고 열린 사회의 적들에게 달려가 안기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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