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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그녀의 말, 그녀의 노래

등록 2020-04-17 17:18수정 2020-04-18 15:40

은유

작가

새벽에 메일이 도착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 어렸을 때 아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경험을 글로 썼는데 수업할 때 읽을 용기가 나질 않아 잠을 설치다가 쓴다고 했다. ‘망설임’이란 단어의 반복에서 20년간 키운 마음의 소란이 느껴졌다. 가해자가 가족이고, 가족인데 가해자다. 피해 자체보다 그 피해를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이 괴로웠다는 그는 그동안 말하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지인에게도 편지가 왔다. 5년 전 애인에게 감시, 폭행을 당한 그는 지난해부터 상담을 시작했고 데이트폭력 피해를 기록하는 책을 준비한다며 조언을 구했다. 보복이 두려워 헤어지지 못하다가 목숨을 건 이별 단행 후 직장을 그만두고 숨어 지냈다고 했다. 그런데 가해자는 태연하게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인 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별 소식을 올렸더라며 “원래 자신을 꾸미는 이야기에 능숙한 사람”이라고 썼다.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두 통의 편지에서 ‘이야기’라는 단어가 내 눈길을 끌었다.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 자기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풀어내는 데 익숙한 사람. 이 서사 구성력의 격차는 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텔레그램 성착취방 운영자 조주빈이 얼굴을 드러냈을 때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는 조씨의 말이 뉴스와 기사 속보로 쏟아졌다. 이에 대해 가수 김윤아가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범죄자에게 마이크를 쥐여주지 마십시오.” 전류가 흐르는 듯한 그의 음색처럼 그의 언어는 뜨겁고 명백했다.

나는 2013년부터 피해자들과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앞서 편지가 말해주듯 이젠 피해자 모임이 아닌 수업에서도 ‘일상 글감’으로 성폭력 사례가 나온다. 수년간 만난 글에서 가해자는 괴물, 짐승, 악마가 아니라 대부분 친족, 상사, 선배였다. 성범죄가 일상적 공간에서 아는 사람에 의해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미투와 통계도 말해준다.

그런데도 매스컴에선 ‘비일상에서 벌어지는 예외적인 범죄’로 프레임을 짜고 가해자의 말, 성장 배경, 병력, 행적 등으로 내용을 채운다. 가해 서사를 반복해서 듣고 자란 피해자는 말문이 막힌다. 피해자 입장에서 성폭력은 괴물도 악마도 아닌 “성폭력만 빼면” 좋은 아빠, 멀쩡한 동료일 수도 있는 사람이 신뢰를 타고 접근해 가하는 폭력이고 힘의 지배 행위다. 이처럼 일상적이고 다층적인 피해의 맥락을 언어화시킬 공적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그날 새벽 편지에 나는 답장을 썼다. 글을 발표하다가 중단하더라도 하는 데까지 해보는 ‘기회’를 당신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기회란 실패할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다행히 그는 끝까지 읽어냈다. 직접 말해봄으로써 ‘어떻게 말하는지’ 스스로 깨우쳤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도 ‘아버지’에 의한 성추행을 생전 처음 말한다며 터놓았다. 더 많은 피해자의 목소리가 더 멀리 들려야 하는 이유다. 가해자 서사가 은폐하는 성범죄의 본질을 피해자 서사는 드러낸다.

김윤아는 솔로 앨범 ‘섀도 오브 유어 스마일’(Shadow Of Your Smile, 2001)에서 ‘FLOW’(플로우)가 여성으로서 자신을 담아낸 가장 아끼는 곡이라며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자우림 3집의 <새>는 여성으로서 제가 깊이 상처받았을 때 만든 곡이었는데, 그 노래를 만들고 난 후 제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새삼 감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 순간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 자기 삶의 창조자가 된다는 걸 김윤아는 알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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