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진환 l 이슈부국장
코로나19 재난 상황을 전하는 신문 지면에는 매일 사망자 집계가 실린다. 무심하게 쌓여가는 그 숫자를 보며 소설가 김훈의 글을 떠올리곤 했다. 그의 문장은 보편적으로 보이는 막연한 것들의 개별성을 꿰뚫어 본다.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죽음은 보편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라면을 끓이며> ‘목숨2’)
각 나라의 전염병 대응 능력 평가가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 방식으로 바뀌면서 한국의 방역 능력이 후한 점수를 받고 있다. 방역당국과 의료진은 온 힘을 다해 나와 가족, 친구와 이웃이 어쩌면 마주할 수도 있는 불행을 막아내고 있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외국의 호평으로 국민의 자존감이 커진 것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성과들이 코로나19로 세상을 뜬 247명의 개별적 죽음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유럽과 미국의 사망자 수가 수만명에 이르고 그 나라의 사망률이 한국보다 높다는 게 고인과 유족들을 위로할 수도 없다. 우리는 그저 끝끝내 공유되지 않는 그 개별적인 죽음을 멀리서 애도할 수 있을 뿐이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는 ‘경제 방역’ 분야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경제 위기는 보편적일 수 있지만, 그에 따른 고통은 개별적이다. 먹고사는 문제로 겪을 개인의 고통은 어쩌면 죽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한 양태를 띠며 퍼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은 보편화되지 않고 쉽사리 다른 이와 공유되지도 않는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 있다.”(김훈 <한겨레> 칼럼 ‘밥에 대한 단상’)
이제 5천만개의 개별적 밥그릇은 예고된 경제 위기에 맞서 각자도생해야 할 처지에 몰리고 있다. 코스피가 한때 1400대까지 떨어졌던 지난 3월 한달 동안 개인이 새로 만든 주식계좌는 80만건 이상이었다. 증가폭으로는 사상 최대치였다고 한다. 주식을 곧바로 살 수 있는 투자자 예탁금도 폭증해 40조원이 넘었다. 개인의 선택은 누구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한국 사회엔 ‘위기를 기회로’ 바꿔내려는 경제적 능력이나 도전정신 가득한 이들이 꽤 많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반대편엔 ‘위기는 기회’라는 말 자체에 절망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한발짝만 밀려나면 절벽 아래로 추락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사람들, 벼랑 끝은 아니더라도 쪼그라든 수입을 속절없이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위기는 그냥 위기일 뿐이다. 이들에게 코로나 이후의 세상과 삶의 방식이 어떻게 달라질지 중요하지 않다. 당장 코로나 이후가 대체 언제냐는 게 더 절박하다. 위기가 저강도 형태로 오래 지속되면 강자와 부자들의 충격이 줄어드는 반면 약자와 취약계층에는 치명적이다. 우리는 몇번의 경제 위기를 거치며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겪은 바 있다.
전염병 방역을 잘했다고 사망자들이 위로받지 못하듯이, 경제적 약자들이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뒤에 찾아오는 ‘경제 방역’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미 산산조각이 난 한 사람의 개별적 밥그릇 앞에서 재정건전성이나 경제성장률, 국내총생산(GDP) 같은 평균값은 무의미하다. 재난이 초래한 불평등과 양극화의 내용이 반영되지 않는 그 평균값은 그들에게 한 숟가락만큼의 위안도 주지 못한다.
정부가 당장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곳도, 경제 방역의 긴 여정에서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할 곳도, 그래서 바로 그들이다. 180석 집권여당과 정부도 언젠가 이 개별적인 밥그릇을 얼마나 지켜냈는가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정부도 그걸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경제 방역에도 골든타임이 있을 것 같지만, 지금인지 아니면 언제까지인지 알 도리는 없다. 통상 시간은 정부 편이 아니다. 정부가 최대한 속도를 내면서도, 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분명하게 했으면 한다. 경제 방역보다 중요한 건 민생 방역이고, 민생 방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취약계층 방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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