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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교육부는 이제 응답하라

등록 2020-04-30 17:52수정 2020-05-02 19:38

한채윤 ㅣ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성교육자 양성 과정에서 강의를 할 때 참고 자료로 보여주는 그림이 하나 있다. 2012년 <조선일보>에 실린 삽화다. 기사는 영국의 연구팀에서 발표한 정자의 이동 방식에 대한 실험 결과를 보도한 것이다. 정자들이 질 안에서 나팔관의 난자를 향해 유유히 헤엄쳐 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실제론 정자들이 벽에 착 붙어서 기어가는 것을 보고 연구진도 깜짝 놀랐다는 후일담을 전해주는 내용이다. 그런데 기사의 제목은 ‘난자 향해 헤엄치는 정자? 알고 보니 낮은 포복’이고, 독자의 이해를 돕겠다고 넣은 삽화엔 ‘정자’라는 글자가 적힌 방탄헬멧을 쓴 세 명의 남자가 한 손엔 총을 들고 포복 자세로 기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언뜻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섬뜩해진다. ‘포복’은 군사 용어다. ‘자세를 낮추어 기어서 적에 접근하는 전투 전진’을 의미한다. 게다가 포복하는 이 ‘군인 정자’들 앞엔 여성의 외음부를 중심으로 묘사된 신체의 일부가 놓여 있다. 정자 한 마리, 한 마리는 각각 한 명의 남자로 의인화되었지만 난자는 의인화는커녕 대신 여성의 몸 자체를 마치 군인들이 점령해야 할 고지처럼 묘사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그림이 일간지에 버젓이 실릴 수 있는 것일까. 정자가 헤엄치지 않고 기어가는 것이 누군가의 자존심이라도 상하게 한 것일까. 그래서 총을 든 군인으로 남성다움을 살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신문사 내의 그 누구도 이것이 문제임을 알지 못해 실린 삽화가 지금도 그대로 게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그림을 성교육자가 성평등한 관점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의인화하는 설명 방식을 쓸 수 있지만, 의인화 자체가 성별 고정관념과 성차별을 도리어 강화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함을 환기시키는 사례로 쓴다. ‘정자가 질의 벽에 붙어서 벽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관찰했다’고 표현하면 될 일이다. 정자는 생식세포일 뿐이고, 인간의 다양성은 생식세포 내의 유전자로 빚어진다. 그러므로 정자 자체를 남성화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정자의 수가 많은 것이 곧 남성의 성욕이 여성보다 강하다는 생물학적 근거가 되진 않는다. 2012년에 나온 저 삽화를 보면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고, 어떻게 불법 촬영물, 성착취 영상물이 버젓하게 유통되고, 적발이 되어도 거의 처벌되지 않는 사회에 살게 되었는지도 이해된다. 엔(n)번방 사건이 터지면서야 곳곳에서 청소년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에 대한 성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되고 있다. 더 빨랐으면 좋을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더 늦추진 않아야 한다. 총을 든 정자가 용납되는 사회에서 살 수는 없다.

연일 언론에서 교육부를 질타하고 있다. 교육부는 뒤늦게 성범죄 전력이 있으면 교사가 되지 못하도록 법 개정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디지털 범죄 예방 수칙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건 임기응변이다. 이미 일선의 성교육자와 관련 단체들은 성별 이분법에 갇혀 성차별을 강화하지 않는, 금욕과 순결을 내세우는 성적 엄숙주의가 아니라 나와 상대를 존중하고 건강하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성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교육부는 이런 노력을 지원하기보단 오히려 훼방을 놓았다. 교육부가 6억원을 들여 2015년에 만든 ‘학교 성교육 표준안’은 시대착오적이고 국제 기준에도 어긋나는 인권 침해 요소로 가득하다. 논란이 생기면 성교육의 많은 부분을 여성가족부의 소관이라며 뒷짐 진다.

교육부는 이제 응답해야 한다. 성폭력이 사라진 세상을 원한다는 전 국민의 염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지금, 결단해야 한다. 성교육에 더 많은 예산을 투여하고, 정식 교과과정으로 확보하는 혁신이 필요하다. ‘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폐기를 선언하고 유네스코가 전세계에 제안한 성교육 프로그램인 ‘포괄적 성교육’을 전면 도입해야 한다. 이젠 더 늦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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