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나의 심장을 부수려고 돌아온 / 이명석

등록 2020-05-08 17:18수정 2020-05-09 19:05

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야구는 당신의 심장을 부수기 위해 디자인되었다.” 예일대 총장과 메이저리그(MLB) 커미셔너를 지낸 바틀렛 지어마티(A. Bartlett Giamatti)의 말이다. 야구는 봄과 함께 피어나, 여름밤을 가득 채우고, 가을의 절정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러니 차가운 겨울비 속에 야구를 떠나보낼 때, 우리의 심장은 부서지고 만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봄이 오지 않았다. 세계의 모든 스포츠 경기장이 문을 닫았다. 잔디밭을 내달리는 다리, 골대를 향해 날아가는 공, 하늘을 찢어버릴 듯 외치던 응원 소리도 사라졌다.

스포츠가 행방불명된 몇 달. 찾아갈 경기장도, 돌려볼 스포츠 채널도 없어진 나는 ‘한갓 공놀이’에 대한 내 오랜 감정을 끄집어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야구는 심장을 부수기 위해 디자인되었다”는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해왔다. 야구는 패배한 팀을 응원하는 자의 마음을 찢어버리려고 만든 고약한 발명품이다. 누군가 승리의 기쁨으로 날뛸 때, 반드시 그 옆엔 쓰러져 울부짖는 자가 있다. 그 고통을 감내하기에 나는 너무 연약한 심장을 타고났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첫 응원을 바칠 팀을 ‘선택’하기보다는 ‘지명’당한다. 보통은 태어난 지역의 연고, 가족들이 응원하는 팀을 따른다. 나는 처음엔 행운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동네 형들을 따라 응원했던 고교 야구팀은 전국대회에서 기적의 승리를 거두었다. 프로야구 지역 연고 팀은 막강한 전력으로 승리를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기쁨은 더 큰 고통을 위한 복선이었다. 그 팀은 한국시리즈에만 올라가면 처절하게 얻어맞았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위한 악역을 도맡았다.

연고지를 떠나 중립지역으로 오자, 심장은 더욱 갈가리 찢어졌다. 친구들과 함께 야구장에 가면 1루 측과 3루 측으로 갈라져야 했다. 나의 팀이 실수를 거듭해 역전패를 당하면, 친구들은 찢긴 가슴에 조롱의 소금을 뿌렸다. 스포츠는 즐거우라 보는 것인데, 왜 항상 절반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비겁한 나는 탈출구를 찾았다. 주변의 누구도 관심 없는 해외의 작은 스포츠 리그를 관전하고, 선수들의 이름도 모르는 아마추어 경기장을 찾아갔다.

“봄이 오면 같이 하자.” 여러분 모두 어떤 약속을 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낯 모르는 사람들과 효창운동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해가 좋은 날 아마추어 축구 경기가 열리면 슬그머니 모이자. 각자 관중석 어딘가에 앉아 축구를 보거나, 샌드위치를 먹거나, 책을 읽자. 세상에서 가장 밋밋한 스포츠 관람객이 되었다가,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불면 조용히 헤어지자. 그렇게 책장 너머로 흘깃흘깃 축구를 보는 게 나에겐 딱이라고 생각했다.

스포츠가 멈추자 나는 살짝 기뻐하기도 했다. 이제 팬들이 의미 없는 점수와 기록을 두고 다툴 일도 없어졌구나.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사람들의 눈이 점점 멍해졌다.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길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쨌든 승리의 기쁨을 누릴 만한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이기고 지는 게임은 심장을 부수었다 살려낸다. 하지만 치르지 못한 게임은 모두의 심장을 말려버린다.

며칠 전 한국의 프로야구가 가장 먼저 봄을 열었다. 이에스피엔(ESPN)에서 중계를 시작하자, 미국의 야구팬들이 응원할 팀을 추천해달라고 몰려왔다. “리그 최악의 팀을 말해줘.” “시즌 초에는 희망을, 결국엔 실망을 주는 팀은 어디야?” 어설픈 한국어로 팀을 정했다는 미국인에게 한국 팬들이 다급히 충고했다. “절대 안 돼요. 건강에 해로워요.” 그러자 답했다. “저는 아픈 팀을 보는 데 익숙해요.” 그들의 말이 나를 흔들고 있다. 이제 돌아가 볼까, 나의 심장을 노리는 저 세계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계엄 거부하고 법무부 사직서…난 반국가세력일까 [류혁 특별기고] 1.

계엄 거부하고 법무부 사직서…난 반국가세력일까 [류혁 특별기고]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2.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내란에 개입한 ‘군내 사조직’, 이 역시 윤석열 책임이다 [사설] 3.

내란에 개입한 ‘군내 사조직’, 이 역시 윤석열 책임이다 [사설]

한덕수 권한대행, 내란·김건희 특검법 즉각 공포하라 [사설] 4.

한덕수 권한대행, 내란·김건희 특검법 즉각 공포하라 [사설]

[사설] 경호처의 압수수색 거부, ‘윤석열 사병’ 자처하나 5.

[사설] 경호처의 압수수색 거부, ‘윤석열 사병’ 자처하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