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ㅣ 작가
어느 날 경찰서에서 ‘용균이 엄마’를 찾는 전화가 왔다. 아들이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병원으로 달려가 응급실에 갔는데 애가 없었다. 왜 없지? 영안실이 갑자기 생각났다. 아이 얼굴이 까맣게 돼 있었다. 머리가 분리돼 있고 등이 갈려 와 있는 상태라고 했다. 회사 사람이 말했다. “용균이가 가지 말란 곳을 갔고, 하지 말란 것을 했으니 보험 들어놓은 것을 받아라.”
그다음 날 현장으로 갔다. 우리 애가 왜 죽었는지 꼭 보고 싶었다. 용균이가 2㎞를 혼자 담당했다. 그 안에는 화장실도 없었고 밤새 홀로 일하다가 끼니를 놓치면 컵라면을 먹었다. 아들의 흔적은 없었다. 컨베이어벨트에 살점이 뜯겨 나간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짐승처럼 울었다. 악을 쓰면서.
태안화력에서 발생한 사고 70일 즈음 어느 토론회에서 ‘용균이 엄마’ 김미숙이 당시 상황을 복기한 말이다. 우연히 그 발언을 듣게 된 나는 뭐에 끌리듯 받아 적었다. 핏빛 서린 말들. 그 종이를 버릴 수 없었다. 그의 동선을 좇았다. 화면과 지면에서 본 그는 매번 같은 복장 같은 대사였다. 검정 옷에 질끈 묶은 머리, 일렁이는 눈동자, 마이크를 든 손으로 호소했다.
용균이 같은 억울한 죽음이 매일 일어난다고,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기업은 다른 사람을 채용해 부품처럼 채워 넣더라고, 더 이상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그런데 그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대학생 필독서 <전태일 평전>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매해 이천명의 노동자가 죽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업재해 부동의 1위 대한민국, 기업 살인이 국가에 의해 허용되다시피 한다는 것도 일반상식이 됐다. 그의 말은 뜨겁지 않아서가 아니라 새롭지가 않아서 허공에 흩어졌다.
김용균 1주기에 나는 김미숙을 인터뷰할 기회를 가졌다. 자식을 잃기 전에는 그도 그랬다고 했다. 노동자들 데모하는 게 티브이에 나오면 흘려들었다고 “내가 세상일에 관심을 가졌으면 아이를 보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탄식했다. 금쪽같은 아들이 죽은 지 1년인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며 “제가 죽어야 해결이 될까요”라고도 했다. 그의 말은 자책과 참회와 분노의 극점을 오갔다.
‘용균이 엄마’는 자리를 잡고 싸우기 위해 아들 이름으로 재단을 출범시켰다. 지난 5월12일 대림동에 마련한 김용균 재단 개소식이 열렸다. 오랜만에 본 그의 표정이 환했다. 용균이 얘기를 할 수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던 그다. 오늘이 그날이다. 아이를 위험한 곳에서 빼내지 못한 미안함을 다른 김용균들을 살리는 것으로 평생 속죄하겠다던 그다. 여기가 그 보금자리다. 날마다 터지는 노동자 부고에 무기력했는데 사무실에 가보니 좋았다.
개소식에서 돌아가는 길, 지난겨울 그가 내게 보낸 문자를 꺼내보았다. “세상을 보는 눈에 분노를 가득 담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에 무뎌지지도 무너지지도 않는 사람만 쓸 수 있는 문장이 빛났다. 꽤 긴 메시지는 당부의 말로 마무리됐다. “민중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여기저기서 처절한 싸움의 마지막엔 예술인들이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땐 성명서 같더니 재차 읽으니 산문시 같았다. 난 관심의 첫 단추로 ‘김용균 재단’ 사이트로 가 후원하기 버튼을 눌렀다. 돕기보다 배우기 위해서다.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아룬다티 로이)는 정의에 따르면, 이 시대 불의에 가장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는 작가다. 남들과는 다른 세상을 본다는 점에서 예술가다. “사람들이 함부로 나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계속 지켜보는 것, 그게 재단의 역할이다”라는 그의 말은 신적(神的)이어서 시적(詩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