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선|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나는 해방촌에 산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 옆에 있는 해방촌은 원래 난민촌이었다. 1945년 해방 직후 만주 등지에서 돌아온 동포들이 얼기설기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처음부터 이주민 동네였던 것이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해방촌은 기지촌화되었다. 지난 세기말부터는 원어민 강사들이 몰려들었다. 미국식 식당과 술집이 많았고, 월세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인, 무슬림 등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공동체도 이리 모였다. 미군 부대 주변은 그나마 인종적 혐오가 덜하지 않나. 지난 75년간 해방촌은 문화적, 인종적으로 다변화되었지만, 이주민 동네라는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 해방촌은 기지촌이 아니다. 용산에 있던 미군은 평택으로 빠졌다. 대신 더 이국적이고 이색적인 상점들이 들어섰다. 모로코 식당, 퀴어 클럽, 비건 레스토랑, 성인용품점. 동네 어귀에는 “KEEP HBC WEIRD”라고 누가 그라피티로 적어놨다. “해방촌을 계속 이상하게 내버려두라.” (외국인들은 해방촌을 줄여서 HBC라고 부른다.)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성지와도 같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슬로건 “KEEP PORTLAND WEIRD”를 따온 것이다. 해방촌은 말 그대로 해방구가 되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던 이름이 이제는 차별과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탈바꿈했다.
내가 이년 전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먹고살기 위해. 해방촌은 대한민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기 가장 좋은 동네다. 전국 유일의 비건 슈퍼마켓이 있고, 식당에 웬만하면 비건 메뉴가 하나씩 있다.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도 해방촌에 둥지를 틀었고, 나는 그 옆에 어느 캐나다인이 버리고 간 클럽을 인수해서 코워킹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해방촌장 전범선’이라는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다. 아무도 나를 촌장으로 선출한 적 없지만, 그만큼 터를 잡고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해방촌이라서 좋은 것도 있지만, ‘우리 동네’가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나는 전에 강남 뱅뱅사거리에 살았다. 25층짜리 오피스텔 전체를 합치면 마을 하나 인구는 될 텐데, 철저히 고립된 기분이었다. 얼굴 알고 인사하는 사람이 지하 슈퍼 아저씨뿐이었다. 집은 깔끔했지만, 파편화된 삶에 염증이 났다. 나는 지금 해방촌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두어 시간 만에 (사장님을 포함해서) 대여섯 명과 안부를 나눴다.
동네에 산다는 것은 공연성을 갖는 것이다. 이웃에게 나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성세대에게는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던 시절이 익숙하고, 그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나 같은 밀레니얼 세대, 90년대생에게는 낯설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세계화 시대를 살고, 코로나 이후 비대면 온라인 세상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익명성과 소외감은 기본이다. 핵가족도 해체되었다. 이제 결혼도 잘 안 하고 애도 잘 안 낳는다. 어쩔 수 없다. 인간다운 삶을 원하면 대안적 공동체를 확보해야 한다.
동네가 미래다.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개인들이 모여 살면서 느슨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공동체. 나에게는 그게 해방촌이지만, 누구에게는 연남동이나 성수동일 수도 있고, 양양이나 제주일 수도 있다. 얼마 전 중소벤처기업부가 모집한 로컬 크리에이터 사업에는 3000여명이 지원해서 22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요즘 소셜 살롱이다, 커뮤니티 서비스다 해서 눈에 띄는 스타트업이 많다.
코로나는 세계화에 급제동을 걸었다. 장거리 이동이 줄고 온라인 소통이 늘어남에 따라 동네 기반 활동에 대한 욕망은 늘어날 것이다. 세계화의 부작용을 보완하는 지역화는 불가피하다. 젠트리피케이션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들 지역재생을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