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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정신 차려, 넌 고길동도 못 돼 / 이명석

등록 2020-06-05 11:18수정 2020-06-06 14:39

이명석 l 문화비평가

언젠가 외진 연수원에서 강의를 하고, 기차역까지 차를 얻어 탔다. 각자 전공이 다른 교수들과 나, 초면의 중장년 남자들이 숨 막히는 40분을 보내야 했다. 이런저런 대화가 툭툭 끊어진 뒤, 한분이 내게 물었다. “참, 만화 칼럼 많이 쓰셨죠?” “아, 맞습니다.” 그러자 차 안의 모든 사람이 신이 나 만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한분이 말했다. “요즘 애들이 ‘최애’라고 하죠. 저는 <보노보노>의 야옹이 형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옆의 분이 놀라며 말했다. “어 나돈데.” 나는 갑자기 만화 속 보노보노처럼 이마에 땀이 솟아났다. 어서 역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그게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다. 만약 내가 미리 써둔 최애 카드가 있다면, 거기엔 ‘야옹이 형’이라 적혀 있을 가능성이 컸다. 좋은 일 아닌가? “나도요!” 하며 떠들썩하게 웃음꽃을 피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선 민망함이 피어났다. ‘나만 야옹이 형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구나. 사실은 중년 남자들, 특히 먹물 좀 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판타지였구나.’ 야옹이 형은 산속 동굴에서 고고하게 살아가며, 작은 동물들이 고민을 안고 오면 명쾌한 철학으로 풀어준다. 그는 숲속의 현자일 수도 있지만, 번잡한 가정과 직장을 떠나 <나는 자연인이다>가 되고 싶은 중년 남자들의 로망일 수도 있겠다.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나는 냉정하게 만화 속 중년 남자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나는 과연 누구와 가장 닮았을까?

요즘 <아기 공룡 둘리>의 고길동을 다양한 화풍으로 그리는 ‘고길동 챌린지’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국산 신작 애니메이션을 방송사가 일정 비율로 편성하는 ‘총량제’를 지키자는 캠페인이다. 그런데 원래는 ‘둘리 챌린지’로 시작했는데, 고길동이 뜻밖의 인기를 모아 주역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둘리를 보며 자란 세대가 성인이 된 터라, 고길동에게 더 큰 공감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시달리고, 집에서는 악성 세입자들에게 휘둘리는 불쌍한 중년. 하지만 서울에 마당 있는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4인 가족의 가부장에 나를 대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혼과는 담을 쌓은 1인 가구의 중년 남자는 없을까? 뜻밖에도 <개구쟁이 스머프>에서 찾아냈다. 벗겨진 머리와 굽은 등을 하고 고양이와 사는 괴팍한 남자, 가가멜. 그런데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에게서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독거 중년남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마법계에서 밀려난 실직 상태로, 가난에 찌들어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닌다. 정서적으로 교류할 사람이 없어 마음이 피폐해지는 가운데, 자유롭고 따뜻한 공동체를 이룬 젊은 1인 가구 스머프들을 미워하게 된다. “그래! 내가 행복하지 않은 건 스머프 때문이야. 저놈들을 잡아 젊음을 되찾고 연금술로 부자가 되자.” 그는 실직, 질병, 심리적 고립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혐오 범죄까지 저지른다.

우리는 만화, 영화, 소설 속에서 나와 닮았는데 훨씬 멋진 사람을 찾아낸다.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하며 ‘나도 좀 괜찮구나’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그게 전부여서는 곤란하다. 나와 닮았는데 아주 추하고 악한 사람도 알아채야 한다. 그를 외면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로 삼아야 한다. 나는 다짐한다. 가가멜은 되지 말자.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깨끗한 옷을 입고, 고양이를 아껴주자. 탈모는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자. 마침 적당한 모델을 찾았다. <월레스와 그로밋>의 월레스다. 그는 혼자 사는 대머리지만 비뚤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정원을 가꾸고, 발명품을 만들고, 가끔 개와 함께 나가 세상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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