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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이재용의 시간’이 말하는 것 / 최우성

등록 2020-06-10 17:05수정 2020-06-17 18:11

최우성 ㅣ 산업부장

경상남도 의령 태생 이병철이 마산에 ‘협동정미소’ 간판을 내건 때가 1936년, 나이 스물여섯 되던 해다. 2남2녀의 막내아들에게 부모는 사업 종잣돈으로 토지 6만평을 대줬다. 2년 뒤엔 청과물과 건어물을 중국에 내다 파는 ‘삼성상회’가 대구에서 문을 열었다. 삼성이란 이름의 대하드라마가 시작된 순간이다.

동북아시아 질서를 뒤흔든 중일전쟁(1937년) 전후의 격변기 세상은 1910년생 청년 사업가 이병철의 더듬이를 건드린 자극제였다. 한국 경제에 한 획을 그은 기업들의 역사가 유독 이 시기 비슷한 또래 인물에게서 시작된 건 우연이 아니다. 경남 함안의 조홍제(1906년생·효성), 경남 진양의 구인회(1907년생·LG), 강원도 통천의 정주영(1915년생·현대)이 대표적이다. 두산그룹의 씨앗을 뿌린 ‘박승직상점’의 박승직(1864년생)이나 전라북도 고창 대지주의 아들로 경성방직을 세운 김성수(1891년생)·연수(1896년생) 형제 정도가 조금 앞선 세대다.

이병철로 상징되는 창업자 세대의 행보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다른 나라, 특히 서구의 후발 산업화 국가의 경험과는 조금 다른 공통된 궤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다. 단순화하자면 기술보다는 영업, 제조(콘텐츠)보다는 장사(마케팅)에 좀 더 무게가 실린 행보다. 우리나라 대표기업들의 원시적 축적 과정은 말하자면 기술자본주의(발명가·개발자)가 아니라 상인자본주의(장돌뱅이)에 가깝다. 합리성과 규범은 애초부터 들어서기 어려웠다. 그 빈자리는 인맥과 수완, 변칙과 같은 비시장적 요소가 채웠다. 장사로 불어난 돈은 그제야 기술 투자와 제조업 진출의 밑거름이 됐고, 군사정권의 개발독재 시기를 거치며 기업은 날개 단 듯 무한 팽창했다. 하지만 창업자 세대에 뿌리내린 한국식 자본주의의 원형은 마치 문신과도 같이 거의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우리 경제에 새겨져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검찰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상대로 청구한 구속영장이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서 기각됐다. 적용된 혐의는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및 시세조종, 외부감사법 위반 등이다. 구속영장은 일단 기각됐으나 불법행위에 면죄부가 내려진 건 아니다. 법원은 두 회사의 불공정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등 기본적 사실관계는 모두 인정했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에 처음 몸담은 건 나이 스물셋 때. 눈여겨봐야 할 건 아버지를 회장으로 둔 회사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는 시샘 어린 시선이 아니다. 그의 시대는 창업자 할아버지 때와도 회장 아버지 때와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우리 사회는 법과 원칙, 시장 규범을 지키고 따르는 행동만이 기업과 국가 경제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깨달음에 다다르고 있었다. 부정거래와 분식회계는 시장 규범을 무너뜨리고 시장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 부회장과 삼성은 새로운 토양에서 옛 씨앗을 버젓이 싹틔운 셈이다.

정미소(협동정미소)와 자동차(삼성자동차), 기술벤처(e삼성). 이병철과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진 삼성 3세대가 본인의 판단으로 가장 먼저 뛰어든 사업 분야다. 이 부회장이 보여준 퇴행적 행태는 삼성을 둘러싼 세상은 천지개벽하듯 변했으되, 여전히 낡은 울타리 안에서 숨 쉬는 무리들의 몸부림이다. 우리 모두가 발 딛고 선 건강한 시장과 사회를 무참히 파괴하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 이후 삼성을 이끌어온 ‘총수’ 이 부회장의 6년 세월이 불법 승계를 위한 고뇌와 준비의 나날이었다는 사실은 허탈하기 그지없다. 나라 잃은 세상에 살던 할아버지는 기업을 일으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힘을 보탰고 지구촌 변방의 사업가 아버지는 우리 기업을 글로벌 무대의 중심으로 올려 세웠다 치자. 21세기 최첨단 세상을 사는 최고경영자 아들이 가장 기초적인 시장 규범조차 짓밟아버리는 기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로지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제가 그 역할을 수행할 때 삼성은 계속 삼성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달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이 부회장은 말했다. 창업자 세대부터 질기게도 이어져온 한국식 자본주의의 악습의 고리를 끊어내고 문신을 지워낼 적임자이자 책임자가 아니라, 외려 상징이자 계승자임을, ‘이재용의 시간’은 스스로 증명한 게 아닐까.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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