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불법승계’ 관련 1심 결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7일 검찰이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불법 승계’ 의혹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징역 5년, 벌금 5억원을 구형하면서 3년2개월간 이어진 재판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 회장은 최소비용으로 그룹 계열사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직-물산 합병 당시 삼성물산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고 허위 정보를 흘린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이 회장에 대한 법원 선고를 두 달여 앞두고 한겨레는 모직-물산 합병을 둘러싼 각종 사건 판결문을 통해 이 회장 승계 과정에 대한 법원의 지난 판단들을 되짚어봤다.
■ “승계작업 부정청탁” 이재용 뇌물공여 인정
가장 먼저 참고할 만한 형사재판은 이 회장의 ‘뇌물공여 사건’이다. 2021년 1월 서울고법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뇌물을 준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법원은 “피고인 이재용은 전 대통령의 뇌물 요구에 편승해 적극적으로 뇌물을 제공했고, 그 과정에서 승계작업을 돕기 위해 대통령 권한을 사용해 달라는 부정한 청탁을 했다”고 판단했다. 이 회장 쪽은 국정농단 사건부터 줄곧 승계작업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지만, 법원 판단은 달랐다.
뇌물공여 사건에서 법원은 ‘모직-물산 합병’ 자체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합병에 대한 ‘조사 필요성’은 인정했다. 당시 법원은 파기환송심 과정에 출범한 삼성준법감시위원회를 이 회장 양형 조건으로 참작하지 않겠다며 “준감위원회가 출범 전 사안이라거나 법원 1심 판결이 아직 선고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합병 사건에 대해 조사에 착수하지 않은 부분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 쪽은 “뇌물공여 사건에서 법원은 ‘합병’에 대한 청탁은 인정하지 않았고, 2015년 7월25일 박 전 대통령과 이 회장의 단독면담 때까지 승마지원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며 뇌물공여와 합병은 관계없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주주 손해배상 청구 대리인단이 2019년 11월22일 오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이 열리고 있는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주주 손해배상과 이 부회장에 대한 법원의 엄정한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 ‘합병은 유효’하지만 주주 피해는 인정
이 회장 쪽 변호인은 2016년 삼성물산 주주들이 제기한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무효소송’ 판결문을 합병 정당성의 근거로 내밀기도 했다. 삼성물산의 주주였던 일성신약이 합병을 무효로 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법원은 합병이 ‘유효’하다고 판단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법원은 “합병이 포괄적 승계작업의 일환이었다 해도 지배구조개편으로 인한 경영 안정화 등 계열사가 얻은 이익도 있다”며 “경영권 승계가 합병의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삼성물산 주식매수가격 결정사건’을 보면 법원이 합병으로 인한 주주 피해를 부인한 것도 아니다. 일성신약 등 합병 반대 주주들은 합병 당시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했는데, 삼성물산은 주주총회의 합병 결의 전날 기준으로 1주당 5만7234원에 되사겠다고 제시했다. 이에 주주들이 법원에 가격조정을 신청하자 지난해 대법원이 주주들 손을 들어줬다. 합병 시점에 삼성물산 주가가 회사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주주들이 1주당 9368원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 합병은 이 회장의 삼성그룹 지배권 강화를 위해 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승계작업의 일환이었다”고 적시하기도 했다.
모직-물산 합병 찬성을 유도해 업무상 배임으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은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판결문에서도 ‘합병으로 주주들이 피해를 봤다’는 법원의 판단은 한결같다. 서울고법은 “피고인 홍완선은 합병 안건의 찬성 의결을 유도하는 등 업무상 임무를 위배해 이재용 등 삼성그룹 대주주에게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게 하고 국민연금공단에 손해를 가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지난해 4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2016년 12월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국민연금·삼성·최순실 게이트 관련, 손해배상소송 청원인 모집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국민연금기금에 손해를 끼쳤다는 의혹을 받는 핵심 당사자들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 ‘1300억원 배상’ 엘리엇 분쟁도 정부 패소
‘한국 정부가 1300억원을 배상하라’고 결론 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의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도 마찬가지다. 2018년 엘리엇은 박근혜 정부가 모직-물산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 의사결정에 부당한 압력을 넣었다며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합병에 정당한 경영상 목적이 있었고, 정부 개입이 없었을 경우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했을지도 확실치 않다’며 맞섰지만, 엘리엇 승소로 끝났다.
중재재판부는 “모직-물산 합병은 이 회장의 이익과 삼성물산 주주의 손해로 이어지는 구조”라는 것이 판정 결과다. 피해액에 대한 계산법은 달랐지만, 중재재판부와 한국 대법원이 ‘모직-물산 합병으로 삼성물산 주주가 피해를 봤다’는 같은 결론을 내린 셈이다.
2021년 8월13일 오전 가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구치소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김남근 변호사(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장)는 “모직-물산 합병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의 판결들은 모두 이 합병이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작업이었고,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 주주들이 피해를 봤다고 인정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 이 회장이 구체적으로 삼성물산 이사회에 어떻게 얼마나 개입했는지가 이번 재판의 쟁점”이라고 설명했다. 법원은 이 회장의 ‘불법승계’ 의혹에 대해 내년 1월26일 선고할 예정이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