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만 원. 후배는 성공한 사업가를 몇 번 인터뷰하고 나서 자서전 한 권을 ‘납품하는’ 대필 알바를 했다. 듬성듬성 빈 곳은 공허하고 상투적인 말들로 채웠다. 자기 일을 쓸 때도 미화와 과장을 일삼는데, 하물며 거액의 알바를 시켜 만든 자서전이니 어련했겠는가.
소설가 이청준의 <자서전들 쓰십시다>를 보면, 거짓 자서전은 잊고 싶은 과거 위에 새로운 이력서를 만들어 도배를 해버림으로써 주인공을 영원한 자기기만 상태에 빠뜨린다고 한다. 이러면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마저도 기만하게 된다. 과거 시제로 썼지만 미래에 대한 자기 암시도 하게 되어 평생 허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회의가 없는 자서전은 더 무섭다. 굳건한 신념 하나가 온 생을 관통하여 어떠한 자기모순도 없는 사람의 자서전이야말로 ‘말로 세운 동상’일 뿐이다.
전두환은 회고록을, 최순실은 옥중수기를 썼다지만 모두 실패한 자서전이다. 자서전은 주장이 아니라 고백이다. 스스로를 해명하려는 노력이다. 변명 비슷한 뜻으로 읽혀서 그렇지, ‘해명’은 자기 삶의 수치스러움과 비논리성을 풀어서 밝히는 일이다.
삶을 미화할 위험이 있는데도 자서전을 쓰는 이유는 자기 삶의 진실을 증언해 줄 게 딱히 없어서이다. 글은 어두운 과거를 분칠할 수도 있지만, 과거에 진실의 빛을 던질 수도 있다. 글은 좌절과 번민, 부끄러움과 헛헛함으로 처진 등짝을 곧추세워 줄 지지대이다. 공허한 말로 나를 포장할지, 진솔한 말로 나를 고백할지는 당신 몫. 말의 기만성과 말의 진실성을 넘나들 수 있는 기회. 부끄러움을 마주할 용기. 우리 자서전을 쓰십시다.
김진해/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