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원묵고 3학년생 가족의 ‘잊힐 권리’ / 황보연

등록 2020-06-17 17:48수정 2020-06-18 09:33

황보연 ㅣ 사회정책부장

“저희 아이 학교 사진 좀 내려주세요.”

며칠 전 편집국으로 한 통의 전자우편이 도착했다. 코로나19 확진 통보를 받았다가, 여러 차례 검사 끝에 ‘위양성’(양성이 아닌데 잘못 진단된 경우)으로 결론이 난 서울 원묵고 3학년생 ㄱ의 아버지였다. 그는 ‘고3 불리하지 않도록…서울대 등 5개 대학 입학전형 변경’ 기사에 물린 원묵고 학생들의 사진을 문제 삼았다. 기사 내용과 무관하게 댓글 공격이 ㄱ을 향할 것이란 이유였다. “어처구니없게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는 아버지의 말에는 며칠 새 가족이 겪었을 고통이 전해졌다. 얼른 사진을 교체한 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ㄱ은 이달 5일 롯데월드를 다녀온 뒤 롯데월드몰에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자진해서 검사를 받았다. 이미 열흘 전 학교에서 인후통 증상으로 검사를 받고 음성이 나온 터였지만 기저질환 등이 있는 가족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ㄱ은 7일 양성이 나온 즉시 롯데월드 쪽에 전화를 걸어 스스로 확진 사실을 알리는 성의도 보였다.

하지만 지금 ㄱ은 ‘자진해서 검사를 받으러 가지 말걸 그랬다’며 자책하고 있다고 아버지는 전했다. 인근 학교들까지 문을 닫고 학생·교직원 771명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지는 동안에 인터넷 공간에선 ㄱ의 신상이 털리고 댓글 비난이 이어졌다. 오락가락 검사 결과를 거친 끝에 ㄱ이 위양성 판정까지 받고 나니 억울함이 더했다. 아버지는 “연일 방역당국 브리핑과 언론 보도를 통해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 정작 우리 가족에게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원묵고 3학년생 ㄱ의 사례는 ‘방역’이라는 대의에 묻히기 쉬운 것이 인권이라는 점을 새삼 깨우쳐준다. ‘피해자’인 확진자·접촉자들이 순식간에 ‘가해자’로 바뀌어 여론의 공격을 받는 일은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일부에선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때와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우려도 내놓는다. 2015년 9월 메르스 사태 직후, 이윤성 대한의학회장이 한 포럼에서 남긴 말은 주어를 코로나로 바꿔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메르스 환자·가족들은 피해자로 여겨지기보다는 경계해야 할 보균자로 인식됐다.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격리됐다. 감염의 공포와 격리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의심환자의 두려움이 무엇일지 고려하지 않고 공중보건이라는 이름하에 이들을 격리하는 데 바빴으며,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 환자, 가족, 일반 시민들에 대한 윤리적인 대응 방식이 무엇일지 찾아보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갤럽 인터내셔널이 지난 3월 28개국의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국의 경우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면 내 개인적 권리 일부를 희생할 수 있다’는 응답이 조사국 평균(75%)을 웃도는 80%에 달했다. 이런 태도는 방역에도 큰 도움이 됐다. 방역당국은 폐회로텔레비전(CCTV)과 신용카드·통신 내역을 확보해 확진자의 동선을 10분 내 도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안심밴드(자가격리 위반 방지용)와 큐아르(QR) 코드(고위험시설 출입용) 도입 등을 하나씩 추진해왔다. 하지만 새로운 조처가 추가될 때마다, 그에 따른 인권침해가 없을지 충분히 살폈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8일 코로나19 인권대응네트워크는 ‘코로나19와 인권을 위한 사회적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격리자(확진자·접촉자)를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이중·삼중 격리시키지 않도록 모든 가능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서울 송파구 인터넷 방역단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공개된 확진자 정보를 찾아내 삭제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접수된 삭제 요청의 상당수는 확진자 본인이거나 가족이다. 댓글을 통한 인격 모독이 주된 이유다. 감염병 위기 국면에서 혐오와 차별, 낙인은 방역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태원 클럽 집단감염 사태에서 이미 우리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그들을 더 숨게 만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코로나 장기전에 대비해, ‘케이(K) 방역’이 놓쳐선 안 될 대목이다.

whynot@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김학의 출금 적법” 판결, 정의에 불법 덧씌운 검찰 1.

[사설] “김학의 출금 적법” 판결, 정의에 불법 덧씌운 검찰

“양지마을의 폭행·감금·암매장”…지옥은 곳곳에 있었다 2.

“양지마을의 폭행·감금·암매장”…지옥은 곳곳에 있었다

[사설] ‘김건희 특검법’ 3번째 거부권, 언제까지 이럴 건가 3.

[사설] ‘김건희 특검법’ 3번째 거부권, 언제까지 이럴 건가

우리가 사랑하는 영도에서 [서울 말고] 4.

우리가 사랑하는 영도에서 [서울 말고]

왜 연애도 안 하고 애도 낳지 않느냐고요? 5.

왜 연애도 안 하고 애도 낳지 않느냐고요?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