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한미 정상회담에 배석한 존 볼턴 전 안보보좌관. 연합뉴스
2018년 5월 유명한 ‘도보다리’ 회담 직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왔다. 남북정상회담 얘기에 이어 곧 열릴 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화제에 올랐다. 두 정상 사이에 잭 니클라우스 골프장이 있는 인천 송도까지 거론하다 문 대통령이 판문점을 권하자 트럼프가 “좋다”며 즉각 공개하려 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참모들과 상의한 뒤 확정하라고 조언했는데 결국 그 과정에서 뒤집혔다. 그래서 결정된 게 싱가포르였다.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회고록에서 싱가포르 회담 전 한·미 정상의 통화 내용을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라고 적었다. 폼페이오는 ‘심장마비가 올 정도’라고 했다고 썼다.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북-미 협상을 ‘한국의 창조물’이라고 한 볼턴 입장에선 이런 통화 자체를 우리의 ‘통일 어젠다’에 휘둘리는 것으로 봤을 수 있다.
볼턴 회고록은 집필 동기가 의심스럽고 진위 논란도 있지만 간과하기 힘든 대목들이 적잖다. 예상대로 볼턴은 애초 싱가포르 회담 자체가 불발되기를 ‘희망’했고 하노이 회담이 불가피해지자 ‘절망’했다고 스스로 털어놨다.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보국장 주문대로 핵 이외에 생화학무기까지 폐기하라며 북한에 허들을 높인 사실도 자랑스레 적어놓았다. 트럼프는 ‘볼턴이 리비아 모델을 주장하는 바람에 회담을 망쳤다’고 트위트를 날렸으나 여러 정황상 그 역시 이벤트 이상의 진정성을 갖고 협상에 임했는지 의문이다. 하노이 회담 때도 ‘러시아 스캔들 청문회’ 보느라 밤을 새우고, 이를 덮는 데 협상 타결과 결렬 중 어떤 게 ‘더 큰 기사가 될지’ 궁금해했다는 대목도 등장한다. 사실이라면, 한반도 운명이 걸린 협상을 초조하게 지켜봤던 우리로서는 분노할 만한, 참담한 장면들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7일 원로들과 만나 북핵 협상에 대해 미국에선 ‘대통령이 하려 해도 참모들이 반대하니 안 되더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런데 참모만 문제가 아니다. 고인이 된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는 ‘군산복합체와 이들의 지원을 받는 보수적 학자들, 보수파 의원들’을 ‘한반도 평화를 반기지 않는 비토세력’(<중앙일보> 2018년 4월10일치 ‘시론’)으로 꼽은 적이 있다. 박한식 미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미군 주둔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또 무기 구매를 종용·강요하기 위해 북한을 악마화하고 있다(<한겨레> 2020년 6월8일치 ‘평화에 미치다’)고 분석했다. 이런 구조와 세력이 문제의 본질이다.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는 내부 사정뿐 아니라 교착 상태에 빠진 북핵 협상의 판을 흔들어보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그러나 세계의 관심을 끌었을지는 몰라도 위험한 도박이다. 당장 한국 상황을 보자. <노동신문> 담화문에 등장하는 ‘노동당 제1부부장 김여정’은 우리 국민에게 불과 1년 전까지 정상회담 때마다 생글생글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던 그 김여정이 아니다. 난폭하고 패륜적인 ‘말폭탄’을 앞세운 생경한 ‘김여정’의 등장은 ‘주적’으로 대치해온 냉전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어렵게 협상을 이끌어온 민족화해·평화 세력 입지는 쪼그라들고 그간의 회담·합의를 ‘위장평화쇼’로 매도해온 ‘적대적 공존’의 냉전 세력은 기가 살았다. ‘3일만 참자’는 선제타격론이나 전술핵 도입 등 비현실적인 주장을 펴던 이들이 “거봐라. 내 말 맞지” 하고 있다.
볼턴 회고록은 툭하면 ‘한국 정부 과속에 미국이 분노한다’며 미국에 발맞추라고 정부 발목 잡던 수구보수 언론·야당에도 성찰을 요구한다. 한반도 평화는 ‘트럼프-볼턴’ 패거리의 안중에 없는 게 드러났는데도 ‘동맹’ ‘동맹’ 하며 미국만 따르자는 건 볼턴 편에 서자는 얘기다. ‘폭파’ 이후 수구보수 언론들은 ‘인내’ 표현까지 꼬투리 잡아 ‘환상에서 벗어나라’며 대통령을 성토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시절 북한이 대북전단용 풍선에 고사총을 쐈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북한과 마주 앉아 합의를 일궈내는 것은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긴 호흡으로 남북 대화를 이어갈 원칙과 분명한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조선일보> 2014년 10월16일치 사설)고 조언했다. 때로 응징이 필요해도 결국 ‘인내’와 ‘대화’ 외엔 방법이 없음을 이들도 잘 안다. 그런데도 정권 따라 말을 바꾸니 언론이 욕먹고 기레기 소리 듣는 것이다.
정부는 좀더 적극적으로 상황 관리에 나서야 한다. 북한 역시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그래야 남북이 좀더 주도적으로 나설 돌파구가 열린다. 트럼프나 볼턴 수준의 인물들에게 우리 운명을 통째로 맡겨서야 되겠는가.
김이택 대기자 ri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