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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김정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 황준범

등록 2020-06-25 17:18수정 2020-06-26 02:38

황준범 l 워싱턴 특파원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쓴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은 여러모로 씁쓸하다. 세 차례 이뤄진 북-미 정상의 만남에서 비핵화와 제재 해제에 대한 양쪽의 인식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를 거듭 보여주기 때문이다. 북한에는 체제의 생존이, 한국에는 한반도 평화가 걸린 절박한 문제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는 언론에 얼마나 멋지게 비칠지, 재선에 도움이 될지의 관점에서 주로 다뤄졌다. 더구나 이 과정을 낱낱이 폭로한 이가 2000년대 북-미 제네바 합의를 깨뜨린 뒤 퇴장했던 초강경파 볼턴이라는 점에 또 한 번 씁쓸하다. 북한이 “인간쓰레기”로 부를 정도로 혐오하는 볼턴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에 ‘훼방꾼’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볼턴의 책에서 남·북·미 정상의 관계가 눈길을 끈다. 우선, 북한 비핵화에 대한 미 행정부 내의 강력한 회의론 속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개인적 친분까지 깨지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2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요구대로 합의하면 선거에 질 수 있다’고 하자,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다치는 일을 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볼턴은 회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노 딜’ 이후에는 재무부의 대북제재 관련 발표를 철회하라고 트위터에 올려 혼란을 일으켰는데, 참모들에게 “오직 한 사람(김 위원장)”을 위한 트위트라고 하는 등 김 위원장과의 관계 유지에 신경을 썼다.

북-미 정상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당장 마주 앉을 여건은 못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대선에 여념이 없고, 뚜렷한 비핵화 성과 없이 또 만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확고해진 모습이다. 북한이 기존 태도에서 양보하면서 미국과 대화를 시도한다 해도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서도 ‘북한의 쇼에 속지 마라’는 비판이 거세질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눈에 띄는 두 번째는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이다. 미국의 금전적 이득과 자신의 재선 유불리를 최우선에 둔 트럼프 대통령, 한반도 평화 노력을 한국 ‘통일 어젠다’로 치부하는 볼턴 같은 강경파, 미국의 귀를 붙들고 끊임없이 ‘최대한의 압박’을 속삭이는 일본 사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야말로 고군분투한 장면들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지난해 2월 하노이에서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노 딜’로 끝난 뒤, 문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제안하면서 그 장소로 판문점이나 미 해군 함정을 예시하며 북-미 대화를 되살리려 했다. 문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 편에 서 있다고 북한이 보기 때문에 남북 사이에 의미 있는 대화가 그동안 이뤄지지 못했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토로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제를 돌리는 와중에도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안전보장을 원한다는 점을 집요하게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가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의 중요한 첫걸음이라는 점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백악관에 강조했다.

이런 한국의 노력을 볼턴은 책에서 “사진찍기에 끼어들려는 시도”라거나 “조현병 환자 같은 생각”이라고 비하했다. 백악관 참모한테 이런 냉소를 받으면서까지 문 대통령은 중재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최근 문 대통령을 향해 “자기변명과 책임 회피, 뿌리 깊은 사대주의”라고 비난했다. 볼턴 책은 북한이 존중하며 협력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명확히 보여줬다. 대남 군사행동 보류를 지시한 김 위원장이 볼턴 회고록을 본 걸까?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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