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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미 제국의 몰락 / 전범선

등록 2020-06-26 14:56수정 2020-06-27 14:18

전범선 ㅣ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미 제국이 몰락하고 있다. 흉흉하다. 역병이 창궐하고, 폭동이 일어난다. 트럼프 탓이 크다. 애초에 몰락하는 제국에 대한 두려움을 팔아서 당선된 선동가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구호는 헛되었다. 그의 임기 동안 미국은 더 옹졸해졌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여전히 독보적인 초강대국이다. 작금의 비엘엠(BLM: Black Lives Matter,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도 미국 민주주의의 진보로 보아야 한다. 앞으로도 미국은 과학기술, 문화예술을 선도할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다.

추락한 것은 미국의 소프트 파워다.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한 요인은 하드 파워, 즉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었다. 소프트 파워였다. 무력 투쟁이 아닌 체제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 적을 무찌르는 힘보다 동맹을 이끄는 힘이 주요했다. 그 힘은 미국의 국제적 위신에 달렸다. 시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는 나라. 자국뿐만 아니라 타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희생을 불사하는 나라. 그것이 적어도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혈맹, 미국의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나라! 나는 어릴 적부터 미국을 사랑하도록 배웠다.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고등학교에서 나는 “앞서간 선진 문명문화를 한국화하여 받아들여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미국을 공부했다. 결국 미국 대학에 가서 학문을 닦았고, “미 육군에 증강된 한국인”으로서 미 군복을 입고 미국령에서 군 생활을 했다. 나는 평생 한국인으로서 응당 미국을 큰형님으로 모셨다. 선진국의 대명사이자 본보기. 1890년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 된 이래 미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거의 그러했다.

하지만 이제는 민망하기 짝이 없다. 2020년 미국은 파탄국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공권력이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무고한 시민을 대낮에 공공연히 살해했다. 240만명이 역병에 감염되었고 12만명이 죽었다. 공중보건 제도는 철저히 붕괴됐다. 그런 마당에 트럼프는 재선을 위한 대형 집회를 개최했다. 심지어 주최 측에서 확진자가 나왔는데도 강행했다. 국민의 생명보다 본인의 집권이 우선이다. 만약 트럼프가 중동이나 라틴아메리카의 지도자였으면 진작에 미국이 침공해서 정권 교체를 했을 거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 일찍이 트럼프는 자국 우선주의를 천명했다. 소프트 파워로 동맹 이끌기를 포기했다. 주독미군을 1만명 가까이 축소하기로 했고, 주한미군도 언제 감축할지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세계도 미국에 큰형님 역할을 딱히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트뤼도, 마크롱, 존슨의 농담거리로 전락했다. 코로나로 무너진 이탈리아에 원조를 보낸 건 중국이었다. 자유 진영의 맹주, 서방세계의 수호자로서 미국은 사실상 은퇴했다.

이번주 출간된 회고록에서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트럼프를 맹비난했다. 국익보다 사익을 앞세우며, 철학도 지식도 없는 작자다. 그가 재집권하면 미국의 외교 정책은 가드레일을 이탈할 것이다. 볼턴의 폭로를 단순 상술 또는 복수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는 1964년 배리 골드워터 선거 캠프부터 레이건, 부시 부자, 트럼프 행정부까지 참여한 골수 공화당원이다. 전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를 퍼뜨려야 한다고 믿는 네오콘 이론가다. 다시 말해, 진성 제국주의자다. 볼턴이 각성할 정도면 미 제국이 정말 위태로운 것이다.

코로나 이후 외교 안보 문제는 핵무기보다 기후위기, 전염병, 난민 대처 능력에 달렸다. 소프트 파워가 더 중요해진다. 미국은 이미 실격이다. 우리는 이제 누구를 본받고 의지할 것인가. 언제까지 큰형님을 모셔야 하나. 난생처음 그분의 축 처진 어깨를 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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