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 l 문화비평가
“아이고 또 오셨네.” 매년 이맘때면 나는 허리를 굽히고 땀을 흘리며 인사한다. 그러곤 상대가 답하기도 전에 냉큼 손부터 내민다. “그럼 잘 가쇼.” 다리 밑을 꽉 잡고 송두리째 뽑아 던진다. 설마 사람에게 그러겠는가? 그럴 만한 기운도 배짱도 없다. 내가 옥상에서 모시고 있는 화분을 찾은 불청객에 대한 이야기다. 흡사 좀비와 혈투를 벌이듯,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잡초들을 퇴치하던 나의 손이 멈춘다. “저기, 처음 보는 분 맞죠?”
나는 ‘아는 잡초’에겐 모질고 ‘모르는 잡초’에겐 약하다. 일단 조심스레 물을 주며 지켜본다. 그러다 살랑살랑 자라는 모양이 마음에 들면 따로 집을 내준다. 이런 작은 화분이 올해는 넷이다. 처음 볼 때는 작은 싹이니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다. 어디선가 바람결에 날아왔거나, 인터넷에서 주문한 모종에 묻어왔겠지. 하나는 생김새가 워낙 특이하다. 펜넬 아니면 딜 같았는데, 점점 딜 쪽으로 보인다. 다른 둘은 손가락 두어 마디인데 벌써 단단한 목질에 예쁜 잎을 뻗고 있다. 운이 좋으면 십년 이상 함께할 친구를 만들 수도 있겠다.
“아이다 싶으마, 쑥쑥 뽑아 뿌라.” 어릴 때 외숙모를 따라 고구마밭에 갔다. 그때 나는 뽑으라는 잡초는 거들떠보지 않고, 맨드라미 옆으로 도망가는 맹꽁이를 쫓고 있었다. 이어 큰 소리가 들렸다. “사람도 마찬가지데이.” 나는 화들짝 놀라 밭으로 돌아왔다. 한참 자라고 나서야 그 뜻을 깨달았다. 화초를 키우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초보는 무엇이든 주변에 자라는 대로 내버려둔다. 그러다 도움도 안 되고 욕심만 많은 잡초들 때문에 사방이 엉망이 되는 꼴을 보고 깨닫는다. 안 뽑으면 내가 죽겠구나.
모두에겐 각자의 잡초 분류표가 있다. 사람마다 ‘일단 내치고 보는 놈’의 종류가 다르다. 자신이 생명력 강한 나무라면 주변에 잡스런 풀이 있든 말든 쭉쭉 잘 자랄 것이다. 허나 나는 연약한 종자라 피해야 할 목록이 많다. 가령 만나자마자 나이부터 묻고, 형 동생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항상 자리에 없는 누군가와 누군가를 비교하는 사람. 어디 집을 사라, 주식은 왜 안 하니, 책보다 유튜브를 해라, 욕심을 부추기는 사람. 이들은 생명력이 강하고 세상 어디에나 있다. 그들을 피하다 보니 나는 직장도 인맥도 없는, 이런 조그만 화분의 사람이 되었다.
식물과 사람을 가꾸는 법은 닮았지만, 또 다르다. 화초들은 양재동 화훼공판장에서, 종묘상 카탈로그에서, 인터넷 화원에서 품종과 모양을 보고 사올 수 있다. 요즘은 희귀한 종류도 많이 들어와, 집안을 관엽수의 패션쇼장이나 고사리의 놀이터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을 골라 뽑을 기회는 거의 없다. 기업의 채용 담당자가 되거나 동아리 회원 모집을 할 때 정도? 돌아보라. 당신의 지인 대부분은 그렇게 고른 사람이 아니다. 우연의 바람을 타고 근처에 왔는데, 서로가 내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 그게 당신의 화단이다.
흙 만진 손을 씻고 집 근처 언덕을 오른다. 거기 손톱만한 로스터리가 있는데, 매일 생두를 볶고 꼼꼼히 날짜와 이름을 적어둔다. 뭐든 좋지만, 간혹 안 마셔본 원두가 있으면 그걸 산다. 가끔은 그 옆 테이블 세 개의 중국집에서, 점심에만 파는 수타 짜장면을 먹는다. 이런 가게들도 내겐 작은 화분이다. 배를 꺼뜨리려고 골목을 돌아간다. 큰 아파트 단지와 낡은 빌라 사이, 언젠가 거주자의 운명을 달리했을 길이다. 거기 콘크리트 바닥이 비뚤게 포장된 틈에 낯선 꽃이 피어 있다. 자연관찰 앱에 물어보니 당아욱이란다. 아파트 단지에 피어났다면 부지런한 경비원이 뽑아버렸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