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원준 ㅣ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우려하던 제조업 고용 대란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필자가 사는 대구는 달성공단의 대표적인 자동차 부품회사들이 폐업과 정리해고에 나섰다. 현대기아차에 납품하는 1차 협력업체인 한국게이츠는 외국 투기자본 블랙스톤의 결정으로 지난 6월26일 공장 폐쇄와 자본 철수를 통보했다. 국내 유수의 법무법인이 변호한다는 사 측의 설명이야 어떠하든, 노동자 150명의 가족들 생계는 이렇게 단칼에 버려졌다. 이미 일감이 줄어 조업이 절반가량 축소된 2차·3차 협력업체들도 앞으로 사정이 크게 다를 리 없다. 이런 일이 어디 대구뿐이겠는가. 가난한 노동자들 삶의 기반이 곳곳에서 무너져내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코로나19 위기 극복의 초점은 일자리 지키기라고 했다. 하나의 일자리라도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다. 기업의 책임은 고용 유지라고 했다. 한국판 뉴딜에 전 국민 고용 안전망 계획이 포함되었다. 우리 모두는 22년 만의 노사정 합의에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우리 모두는 최근 그 합의 시도가 좌초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잠정합의안 원문을 확인하면서 안타까워했다. 누구도 이 합의가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 어렵게 도출된 사회적 타협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합의안에서 정부는 전 국민 고용보험의 로드맵을 연말까지 만들고 국민취업지원제도를 내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이는 정부의 기존 계획 내용과 일정 그대로다. 노사정 합의와 관계없다. 고용보험기금의 확충이나 모성보호급여의 일반회계 지원은 합의안에서 검토 대상으로 미뤄졌다. 상병급여는 전 국민 고용보험만큼이나 사용자들의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과제라는 점에서 합의안의 소극적인 조항으로는 전망이 어둡다. 노동자에게 사용자가 지급하는 휴업수당이 감액되도록 정부가 돕겠다는 대목에서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합의안이 마땅히 누구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하며 우리는 누구의 시각에서 합의안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재난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면 우리의 입장은, 오늘 가장 극심한 고용 불안에 내몰리며 삶의 기반이 무너져내리는 취약 노동자들의 그것이 되어야 옳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합의안의 핵심은 노사의 고통분담을 강조하며 사용자가 고용 유지 노력을 기울이고 노동자는 이에 적극 협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사용자가 만약 직접고용 정규직을 위한 해고 회피 노력 명분으로 하도급을 축소하고 비정규직의 계약 갱신을 중단하면 노동조합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용자의 이런 고용 유지 노력에 협력할 것인가? 아니다. 민주노조는
그래서는 안 된다. 합의안은 사용자의 고용 유지 노력에 그런 조치가 배제되게끔 명시해야 했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에게 한시적으로 근로기준법상 해고 제한에 준하는 규정을 적용하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했다.
합의안이 강조하는 상생은 원하청의 수직 위계와 경제위기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공염불이다. 기간 경과로 계약이 해지되면 비정규직은 고용 유지의 대상도 아닌데 무슨 상생인가? 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용자 책임을 강화하라는 노동계의 요구를 줄곧 외면했다.
지난 6월에도 중앙노동위원회는 위험의 외주화 금지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원청을 상대로 금속노조에서 제기한 조정신청을 조정 대상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정부는 대선 공약을 어기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과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도 따르지 않고 있다. 최근 고용 대책에서도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과 고용보험 사각지대의 취약 노동자들은 사실상 배제하고 있다
. 그러면서 이번에는 노사정 합의의 고용 유지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 재난의 비극을 전가하려는 것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 총고용 유지를 위한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을 요구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라는 것뿐이다. 이번 경제위기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대통령 말씀대로 일자리를 지켜내는 것이다. 노사정 합의가 좌절되더라도 총고용 유지라는 목표는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소모품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