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강준만 칼럼] 합법적 약탈

등록 2020-07-05 18:49수정 2020-07-06 02:37

정부와 언론이 이런 부동산 약탈 체제를 계속 고수한다 하더라도, 누구건 진실을 알고 살아야 할 권리는 있는 게 아닌가?

‘편 가르기’의 광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정치의 목적은 ‘반대편 타도’로 전락하고 만다.

잘못된 모든 것은 ‘반대편 탓’으로 돌리고, 우리 편에 대한 내부 비판은 ‘배신’과 ‘변절’로 매도하는 광란의 수렁에선 합법적 약탈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설 땅이 없다.

강준만 ㅣ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부동산 가격 폭등은 ‘합법적 약탈’이다. 내 집 마련해보겠다고 뼈 빠지게 일해 저축한 사람들, 전세·월세가 뛰어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된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폭력으로 뺏어가는 약탈보다 더 나쁜 약탈이다. 폭력적 약탈을 저지른 악한은 그 정체가 분명하고 처벌받을 수 있지만, 합법적 약탈엔 지목할 수 있는 행위 주체마저 없어 ‘피해자 탓하기’라는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 합법적 약탈은 시스템의 문제다. 그 시스템의 관리 책임자인 정부를 약탈의 주범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이 주범이 처벌받을 수 있는 상한선은 그저 무능하다는 수준의 비판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이런 합법적 약탈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진보-보수 정권들이 번갈아 가면서 합동으로 발전시켜 온 약탈 체제이기에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질 건 없다. 한국의 정치판과 고위 공직은 주로 이런 약탈 체제의 수혜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약탈의 피해자들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다. 누구 말마따나 “정치는 원칙의 경쟁으로 위장하는 밥그릇 싸움”에 지나지 않으며, 그 싸움의 와중에서 외쳐지는 ‘정의’ ‘공정’ ‘평등’과 같은 아름다운 말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키우기 위한 기만적 언어일 뿐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그런 합법적 약탈이 일어날 수 없는 아름다운 공간이 있으니, 그게 바로 지방이다. 물론 모든 지방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보아 지방에선 부동산 가격 폭등보다는 하락이 주요 이슈가 되는 건 분명하다. 부동산 가격은 일자리 문제와 직결된다. 일자리가 많은 곳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고, 적은 곳의 부동산 가격이 내리는 건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정부의 무능은 이 초등 상식을 위반하면서 서울의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큰소리를 쳐왔다는 점에서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3기 수도권 신도시’ 건설 정책은 국가균형발전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 인구를 넘어섰는데 왜 축포를 터트리면서 자축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빈말이래도 2년 전 국가균형발전 비전 선포식에서 ‘지역이 강한 나라, 균형 잡힌 대한민국’을 외쳤던 것에 감사해야 할까? 차라리 솔직하게 국가균형발전은 없으니 헛꿈 꾸지 말라고 말해주는 게 훨씬 더 나은 게 아닐까? 적어도 기만은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정부만 탓할 일도 아니다. 나는 최근 서울 부동산 가격 폭등에 관한 언론 기사들을 열심히 찾아 읽으면서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맹렬한 비판과 더불어 미시적 분석은 뛰어날망정, 근본적 원인을 규명하는 거시적 분석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일자리와 더불어 한국형 계급투쟁의 최고 관문인 ‘명문대학’을 집중시키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이런 일련의 정책과 서울 부동산 가격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는 건가?

지금 나는, 정부가 문자 그대로의 ‘서울 공화국’을 만들겠다고 나서고, 서울의 언론이 그런 정책 방향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다. 서울 부동산 가격 폭등이 일시적으론 주춤할 수 있어도,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을 외면하는 반쪽짜리 분석과 비판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 이에 대해 묻고자 하는 것이다. 정부와 언론이 이런 부동산 약탈 체제를 계속 고수한다 하더라도, 누구건 진실을 알고 살아야 할 권리는 있는 게 아닌가?

시로 파시즘에 맞서 싸웠던 영국 시인 세실 데이루이스는 “정직한 꿈을 꾸며 살았던 우리가 나쁜 사람들을 더욱 나쁜 사람들과 비교하여 옹호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논리다”라고 개탄했다지만,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편 가르기’의 광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정치의 목적은 ‘반대편 타도’로 전락하고 만다. 잘못된 모든 것은 ‘반대편 탓’으로 돌리고, 우리 편에 대한 내부 비판은 무조건 ‘배신’과 ‘변절’로 매도하는 광란의 수렁에선 합법적 약탈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설 땅이 없다.

나는 평소 “전주는 천국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걸어서 출퇴근하는 축복을 누리는 등 그만큼 지방의 삶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왜 이런 사적인 이야길 하는가? 나를 생각해 “지방 이야기 좀 그만하라”고 조언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불평불만이 가득 찬 사람처럼 보인다나. 그럼 어떤가. 불평불만을 할 시간조차 없이 전쟁하듯 고되게 살아가는 합법적 약탈의 피해자들을 위해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말을 누군가는 계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사설] ‘김건희’ 위해 “돌 맞고 가겠다”는 윤 대통령 1.

[사설] ‘김건희’ 위해 “돌 맞고 가겠다”는 윤 대통령

김 여사가 대통령 같은 나라 [뉴스룸에서] 2.

김 여사가 대통령 같은 나라 [뉴스룸에서]

[사설]‘해병대’ 수사 방해하려고 공수처 인사 질질 끄나 3.

[사설]‘해병대’ 수사 방해하려고 공수처 인사 질질 끄나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4.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윤 대통령의 ‘부하’를 자처하는 최재해 감사원장[아침햇발] 5.

윤 대통령의 ‘부하’를 자처하는 최재해 감사원장[아침햇발]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