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 ㅣ 그래픽노블 작가
소나무가 먼저 눈에 확 들어왔다. 붉은 몸통, 파라솔 모양의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 푸른 솔. 보자마자 “이 집이다”라고 확신했다. 지금 살고 있는 강화도 집 이야기이다.
만으로 22살에 부모의 집을 떠났다. 부모는 말렸으나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프랑스에서 살았던 첫 집은 알프스 산자락 아래에 있는 샹베리라는 작은 도시의 어학원에 붙어 있었다. 스튜디오라고 불렀는데 한방에 침대와 책상이 있고 키친 코너와 제법 큰 욕실, 화장실이 따로 있었다. 모던하고 깨끗했다. 단지 비싼 게 흠이었다. 도착하고 일주일 뒤부터 저렴한 방을 찾으러 다녔다. 그렇게 찾은 집이 프랑스인 할아버지가 월세를 놓는 집이었다. 이백년이 된 그 돌로 된 집은 천장 높이가 4m 정도 되었다. 내가 그 집에 들어갈 때 같은 어학교에 다니던 일본인 여학생도 들어갔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우린 제법 친해져 밥도 같이 해 먹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도 했다. 그가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학교로 떠나고 나도 그 집을 나왔다. 주인집 할아버지가 육중한 배를 자랑하며 수건 하나만 걸친 채 알몸으로 집 안을 활보했기 때문이다.
다시 어학교 스튜디오로 온 나는 월세를 아끼기 위해 폴란드 여학생과 세를 반씩 지불하고 살았다. 그는 밝고 긍정적이어 보였지만 저의 나라 친구들을 불러 늦은 저녁까지 수다를 떨었다. 계속 그곳에서 지낼 수가 없었다. 짐을 싸서 나왔다. 마침 한 프랑스인 가정에서 베이비시팅을 한다기에 그 집에 들어갔다. 돈도 벌고 먹고 자는 문제도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아이가 넷, 고양이가 두 마리 있었다. 아이들도 착하고 고양이도 사랑스러웠는데 몸이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천식 발작까지 일으켰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당시 의사는 내가 알레르기로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1월 중순이었다. 집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구 소개로 프랑스인 화가 집의 마당에 있는 카라반에 머무르기로 했다. 깊고 푸른 밤하늘 아래 카라반과 나를 상상하니 그 고독마저 감미로웠다. 마르크 샤갈의 <블루 바이올리니스트>(Blue Violinist)가 떠올랐다. 상상과 현실이 같다면 인생은 너무 쉬웠을 것이다. 뼈를 스며드는 눅눅한 프랑스의 겨울이 침대 시트와 옷에 내려앉았다. 늘 축축했다. 감기를 달고 살았다. 다행히 내 그림을 좋아하던 집주인이 두 달간 여행을 간다고 나만 좋다면 본인의 집에서 지내라고 했다. 화가의 집 벽난로는 따스하고 낭만적이었다. 감자와 밤을 구워 먹었다.
사부아 대학교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로 옮겼을 땐 호텔경영학과에 다니는 여학생과 살았다. 그는 알자스 지방 출신이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했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 끼는 그가 해주는 음식을 먹었다. 주말에는 함께 자전거를 탔다. 그와는 지금까지도 연락을 한다.
스트라스부르 미술학교에 다니며 구한 방은 작은 다락방이었다. 지붕 바로 아래 있어서 서 있기도 불편했다.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학교에 ‘파르타주’라는 광고를 보고 네 명의 외국인 학생들이 사는 집에 들어갔다. A는 대마초에 절어 살았고 B는 매일 밤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왔다. C는 설거지를 쌓아 두었다. D는 찢어진 반바지에 갈색 털이 엉킨 다리를 자랑하며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곤 했는데 전혀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졸업을 하고 파리로 이사를 왔다. 리옹역 근처였는데 습기가 많아 옷에 곰팡이가 끼었다. 이후 퐁피두센터 근처,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집을 얻었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가까운 마레 지역이나 퐁피두센터 전시도 보러 가고 루브르 박물관을 지나 오르세 박물관까지 센강을 따라 산책했다. 걷는다고 갑갑했던 현실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거리를 두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아랫집 노부부가 괴성을 지르며 밤낮 가리지 않고 다툰다는 거였다. 집이 좋아도 이웃을 잘못 만나면 지옥이 된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오래되고 소박한 동네에 살았다. 사람들은 정겹고 친절했다. 하지만 재개발로 내가 살던 다세대 주택에서 나가야 했다. 우연히 알게 된 강화도 책방 ‘국자와 주걱’에 왔다가 지금 사는 이 집을 보게 되었다. 오래된 소나무와 산이 내가 태어난 고향 집을 연상시켰다. 얼마 뒤 나는 이사를 했다. 만 22살, 부모를 떠난 뒤 살게 된 스물네 번째 집이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소설 속의 엄마는 서울 사대문 안에 사는 것에 집착한다. 당신은 어떤 집을 꿈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