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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대문자 B, 존중과 이해의 첫걸음

등록 2020-07-08 17:39수정 2021-01-25 18:19

지난 6일 미국 미네소타주 필랜도 캐스틸 기념관 안에서 한 소녀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뜻의 ‘BLM’을 꽃으로 새겨둔 잔디밭을 걷고 있다. 캐스틸은 4년 전 경찰관의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연합뉴스
지난 6일 미국 미네소타주 필랜도 캐스틸 기념관 안에서 한 소녀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뜻의 ‘BLM’을 꽃으로 새겨둔 잔디밭을 걷고 있다. 캐스틸은 4년 전 경찰관의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 연합뉴스

로버트 파우저 ㅣ 언어학자

5월 말 미국 미니애폴리스 경찰관 폭력 진압으로 인한 흑인 남성 사망 사건 규탄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난 존슨 선생님을 자주 떠올렸다. 남부 앨라배마주 출신 흑인 여성이자, 1950년대 펼쳐진 흑인 인권 운동 시위에 참여하셨던 선생님은 흑인 인권 운동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어린 우리에게 관련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다. 그중 아이스크림 가게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백인 전용 카운터에 흑인들이 몰려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백인 종업원은 거부했고, 쫓아내기 위해 아이스크림 위에 케첩과 겨자를 뿌렸지만 흑인들은 끝까지 다 먹고 계산을 하고 나갔다. 평화적으로 백인 전용 공간을 넘은 것이다. 이후 1964년 인종에 따른 서비스 거부는 전국적으로 불법이 되었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갈 때마다 이 일이 떠오르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쓰기와 발표 숙제가 있다. 선생님은 흑인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고 발표하는 숙제를 내주셨는데, 흑인은 인종 집단이기 때문에 ‘black’의 첫 글자 ‘b’를 반드시 대문자로 써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흑인을 ‘Black’으로 써왔다. 고등학교 3학년 영어 선생님은 백인 할머니 선생님이었는데, 유난히 까다로우셨다. 반드시 소문자로 써야 한다고 하셨다. 그 수업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존슨 선생님에 대한 존중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수업에서는 항상 대문자로 썼다.

1980년대 말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두 차례 출마한 제시 잭슨 목사는 ‘흑인’이라는 단어보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에 사는 흑인들이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노예로 끌려온 이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라는 표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후로 이 단어는 사회 전반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흑인’이라는 표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흑인’이라는 표현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미국에 급격하게 늘어난 이민자 중에는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온 이들도 많았다. 이들을 가리켜 모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어색했다. 남미에서 온 흑인 이민자는 아프리카와 관련이 없지 않은가. 이런 이들을 한꺼번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부르면 이들을 모두 아프리카 출신으로 이해하게 되고, ‘아프리카’가 출신국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백인들에게는 ‘유럽계 미국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계 미국인’(Irish American)처럼 주로 대륙이 아닌 출신국으로 지칭한다. 그래서일까. 2014년 흑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적 대응에 항의하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널리 쓰인 캐치프레이즈는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였다. 이로써 ‘흑인’의 사용 빈도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첫 글자는 당연히 대문자였다.

‘흑인’을 둘러싼 논쟁도 없지 않았다. 첫 글자를 소문자로 쓰면 ‘검은색’(black)이라는 단어와 차이가 없으니 당연히 대문자로 써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게다가 ‘black’은 문법적으로 명사가 아닌 형용사이니 구분해야 한다고도 했다. 대문자를 쓰면 백인도 대문자로 써야 한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그렇게 하면 구조적인 인종 차별을 재생산한다는 반론도 만만찮았다. 역사적으로 백인의 내재화된 우월주의 때문이었다. ‘색깔’로 인종 집단을 구별하는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컸다. 이렇듯 ‘흑인’을 둘러싼 논란과 비판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던 중 미국 사회에 매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월 <에이피>(AP) 통신이 대문자를 쓰기 시작한 이래 ‘흑인’(Black)의 사용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논의 중이라고 알려졌는데, 이 역시 시간문제처럼 보인다. 이런 뉴스와 기사를 볼 때마다 47년 전 존슨 선생님이 떠오른다. 아직 어린 백인 남학생에게 대문자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가르치셨던 그 선생님의 마음을 그때도 존경했지만, 시간이 오래 흐른 뒤인 오늘은 더 존경한다. 그 가르침 속에 아픈 역사의 전달과 함께 흑인에 대한 존중의 태도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대문자 ‘Black’을 쓴다. 사소한 일 같은가? 존중과 이해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이런 사소함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부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미국에서 독립학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미시간대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응용언어학 박사. 한국어 저서로 <외국어 전파담>,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탐구기>가 있다. 이 글도 한국어로 작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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