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혜 l 시인
나는 작은 일에도 예민하다. 사소한 사건에도 마음이 제 리듬을 잃고 요동치곤 한다. 시인답게 말하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겠지만 사실 그런 지순한 성정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안달하는 성미에 가깝다고 하겠다. 내 마음을 거스르는 일들은 그야말로 소소하다. 창작물에 달린 날 선 댓글, 창틀을 울리는 윗집 실외기의 소음, 급하다기에 밤을 새워 가며 넘긴 시안을 확인조차 않는 클라이언트 등등. 나는 이러한 것들을 ‘마음의 거스러미’라고 부른다. 삐죽 돋아나 따끔따끔 마음이 쓰이고 종국엔 내 삶의 매끈함을
해치기 때문이다.
어떤 거스러미들은 제거가 가능하지만 어떤 거스러미들은 딱히 대처할 도리가 없다. 나는 날 선 댓글에 침묵할 것이고, 윗집과는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으며, 클라이언트에게는 항의할 배포가 부족하다. 결국 이 까칠한 쓰라림들을 도리 없이 지니고 살아야 한다. 이처럼 일련의 사건들에 끙끙대며 마음을 낭비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조언은 이것이다. ‘신경 쓰지 마.’ 모두들 말한다. 에이, 신경 쓰지 마.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그래, 소심하게.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크게 끄덕이며 다짐한다. 그래,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인데, 어서 이 뻗친 신경을 거두고 다른 생산적인 일에나 집중하자. 그렇게 되뇌며 마음을 다잡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다. 여전히 내 신경은 사태에 접착되어 있다. 그러면 또 자괴감이 든다. 왜 나는 거스러미에 집요한가. 왜 마음의 쓰레기봉투들을 내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악취에 고통받는가.
그러다 문득 ‘신경 쓰다’와 ‘신경 쓰이다’의 차이를 생각하게 되었다. ‘신경 쓰다’는 나의 의지와 닿아 있다. 내가 자의적으로 내 신경을 쏟아 그것에 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경 쓰이다’는 불가항력적이었다. 나의 언어 감각으로 이것은 ‘가렵다’나 ‘마렵다’에 가까웠다. 내 일상을 흩트리는 대부분의 사태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저절로 그러했다. 내가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신경 쓰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의식 저 한구석이 간지러운 것처럼. 그리 생각하니 ‘신경 쓰지 마’라는 말은 마치 어딘가 가려운 사람에게 ‘가렵지 마’라고 한다거나 뭔가가 마려운 사람에게 ‘마렵지 마’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 의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딘가가 심각하게 가려운데 긁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최초엔 가려움이 복받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가, 점점 다른 부위에 자극을 줘서 신경을 분산시키려 노력하면서, 가려움이 사그라들길 기다릴 것이다. 아마 나의 신경이 가라앉는 순서도 비슷한 것 같다. 최초엔 집착적으로 마음을 기울이다, 지쳐 나가떨어져 유튜브라도 보며 기왕의 생각에서 벗어나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느리지만 자연스럽게 거스러미는 무뎌지고 순해지고 급기야는 살에 편입되는 순간이 온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적어도 나는 특정 사태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자신에게 자괴감만은 갖지 않게 되었다. 가렵고 마려운 것이 의지의 문제는 아니듯 뭔가가 신경 쓰이는 것이 내 의지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건 그냥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누군가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할 때 ‘신경 쓰지 마’라고 손쉽게 말하지 않겠다고. 그건 개인의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특정한 일에 마음을 쓰며 번민하는 당신에게 누군가 ‘신경 쓰지 마’라고 무심하게 말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신경 쓰는 게 아니고 이것이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거라고. 내가 집요한 게 아니고 이 사태가 집요한 거라고. 나에게는 이 손아귀에서 벗어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