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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스토리텔링과 하이데거 / 정대건

등록 2020-07-17 16:03수정 2020-07-18 02:35

정대건 ㅣ 소설가·영화감독

철학과를 나온 이력 때문에 순진무구한 질문을 많이 들었다. “전공을 살리면 철학관 차리는 거예요?” “사주 봐줄 수 있어요?” 우스갯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라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정말 흔하게 들어봤을 말이다. 물론 주역을 공부하면 사주를 풀이할 수는 있겠으나, 철학과 전공 수업에서 점치는 법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거라도 배웠으면 굶을 걱정은 덜 했을 수도 있었겠다.

안타깝지만 나조차도 무엇을 배우는 과인지 모르고 들어갔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며, 달을 보러 다니고, 사색을 즐기던 10대 청소년은 ‘아무개의 인생철학’ 할 때의 철학이 그 철학인 줄 알고 철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철학과를 2년 다니고 나서야 철학은 오히려 차가운 수학에 가까운 것이고, 인생의 고민을 해소해주는 학문이 아님을 배웠다. 10대 때 내가 품었던 것이 냉철한 철학적 고민이 아니라 뜨거운 문학적 감수성에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또 들은 질문 중에 철학과를 나왔으면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느냐는 말이 있다. 어떤 생각에서 기인한 말인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박찬욱 감독이 철학과를 나온 사실의 아우라가 너무 큰 것일까. 내 의견으로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적 사고는 스토리와 관련된 작품을 (해석하는 데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창작하는 데 대체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스토리를 쓰는 사람으로 사는 지금의 나에게 철학과에서의 배움은 쓸모없던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진 않다. 내게 ‘인생 강의’라 할 만큼 큰 영향을 준 수업이 있으니 김창래 교수님의 ‘끝으로부터 철학하기’ 강의였다.

“플라톤은 철학을 ‘죽는 연습’으로 규정하며, 하이데거 역시 철학하는 현존재에게 ‘죽음에로 미리 달려가 볼 것’을 권한다. 철학자는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연습을 통해 끝의 순간에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존재의 관점에서 삶을 관조한다.”

‘지금’의 의미는 끝에 가서야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알 수 있고 현재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뭘까, 불확실한 미래에 한 치 앞도 내딛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 시절 내게 끝을 향해 자신을 내던짐을 권하던 그 수업은 감동이었다. 누군가 내게 철학과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어보면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던 용어들은 전부 잊어버렸지만, 끝에서부터 사유하려는 태도(관점) 하나만큼은 체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덕분인지 관계에서도 끝을 먼저 생각하는 슬픈 사연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시나리오 작법서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그 수업 내용을 스토리텔링에 접목해도 의미가 통한다며 감탄했다. 스토리의 세계는 인간의 유한한 일생과 마찬가지로 끝이 있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끝이란 ‘그전에 전개된 사건 다음에 필연적으로 오는 장면’이라고 정의했다. 잘 짜인 스토리를 감상하고 나면 처음과 중간, 스토리의 전체가 끝부분의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복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으며 만족감을 느낀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은 적어도 스토리텔링에서는, 처음과 중간이 엉망이다가 끝에 가서 얻어걸린다고 해서 다 좋다는 뜻이 아니다. 스토리의 처음과 중간이 좋지 않은데 엔딩이 좋게 작동할 리 없다. 결국, 끝이 좋아지려면 처음과 중간이 잘 설계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가 아니라, ‘끝이 좋아야 전체 이야기가 좋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현재까지 유효하다. 모든 부분의 의미는 끝으로부터 재해석된다. 이것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하고 나니, 훌륭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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